구학첩에 부치는 글(丘壑帖跋)- 조영석
글쓴이 : 관리자     첨부파일 :       날짜 : 02-07-15    조회 : 3966
원백(元伯:謙齋 鄭敾의 字)의 이 두루마리 그림은 용묵(用墨)에는 아무런 자취를 남기지 않고 선염(渲染:색칠할 때 한 쪽을 진하게 하고 다른쪽으로 갈수록 차츰 엷게 칠하는 일. 바림질)에는 법도를 갖추고 있으면서, 깊어서 차분하고 넘치도록 그윽하며, 무르녹아 윤택하고빼어나게 아름다워 거의 남궁(南宮: 북송의 서화가 米&\#33470. 그가 禮部員外郞을 지냈으므로 ‘미남궁’이라고도 부른다)이나 화정(華亭: 명말의 서화가 董其昌. 화정은 그의 출생지인 江蘇省華亭縣에서 비롯되었다)의 경지에 들었다고 할 만하니, 우리 조선 삼백년 역사 속에서 아직 이와 같은 화가는 없었다고 하겠다.
내 생각에는 우리나라에서 산수를 그리는 화가들 가운데 윤곽이나 구도, 16가지 준법, 온갖 물결의 묘사 등에 있어서 일사불란한 이론과 방법이 있음을 능히 아는자가 없는 듯하다. 그래서 비록 층을 이룬 봉우리나 첩첩한 묏부리일지라도 오로지 수묵(水墨) 한가지로 한결같이 칠해버려 앞과 뒤, 멀고 가까움, 높고 낮음, 얕고 깊음이나 흙산과 바위산의 평탄하고 험난한 형세를 분간할 수 없게 만들며, 물을 그릴 때에는 잔잔히 흐르거나 사납게 솟구치거나에 관계없이 한꺼번에 두자리의 붓을 쥐고 노끈이 꼬이듯이 그려내니 어찌 참다운 산수가 있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이와 같이 논하였더니 원백 또한 옳다고 여기었다.
원백은 일찍이 백악산(白岳山:곧 북악산) 아래 살았는데, (그림을 그리고픈) 마음이 내키면 당장 산을 마주하여 그리곤 하여 준법(峻法:산수화를 그릴 때 전체 모습의 외형을 마친 후 산, 바위, 흙더미 등의 입체감,양감, 질감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법)을 구사하고 먹을 운용함에 있어서 스스로 마음에 깨우친 바가 있었다. 나아가 내금강과 외금강에 드나들고, 또 영남의 여러 경승을 두루 편력하여 그 계곡이나 산마루의 형세를 남김없이 파악하였으며, 만일 그가 (그림에) 쏟은 공력을 이야기하자면, 그가 사용한 붓을 묻으면 거의 무덤을 이룰 것이다. 이에 능히 스스로 새로운 격조를 창조하여 우리나라 화가들이 한결같이 마구 칠해버리는 누습을 깨끗이 씻어버렸으니, 우리나라 산수화는 무릇 원백에게서 비로소 개벽하였다고 하겠다.
그런데 내가 본 금강의 여러 산을 그린 원백의 화첩에서는 모두 두 자루의 붓을 쥐고 붓끝을 세워 쓸어내리듯 그려 난시준(亂柴&\#30388: 정선이 우리나라 岩山을 표현하기 위해 창안한 필선으로 거침없이 수직으로 죽죽 내려긋는다하여 수직준이라 부르기도 하였다)을 이루고 있었다. 이 두루마리 그림도 그와 같으니 어찌 영동과 영남의 산 모습이 같을 수 있겠는가! 또한 포치(鋪置)에 있어서도 종종 너무 빽빽하고 답답하여 화폭에 가득한 언덕과 골짜기로 인하여 하늘빛을 조금도 볼수 없으니, 원백이 마무리 솜씨에 있어서는 아직도 미진한 바가 있는 듯 하다. 과연 원백은 이 점을 어떻게 여길지 모르겠다.

조영석[1686~1761]의 《관아재고 觀我齋稿》에서 발췌하였습니다.


-덧붙이는 글

《구학첩》은 정선이 하양현감으로 재직(1721-1726)할 당시 김광수(金光遂)를 위해 영남(嶺南)과 사군(四郡)을 그린 화첩으로 추정된다.

  
<쌍도정도 雙島亭圖>는 정선이 하양현감으로 있을 때 경상도 성주(星州) 관아 객사인 백화헌(百花軒)의 정자를 그린 것으로 《구학첩》이 전하지 않는 지금 이 그림을 통해 하양현감 시절 정선이 그렸던 영남의 실경산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쌍도정도> 비단에 담채, 세로 34.7cm 가로 26.4cm,개인 소장.
















  
<만폭동 萬瀑洞>은 <금강전도金剛全圖>와 함께 조영석이 <구학첩발>에서 언급했던 난시준(亂柴&\#30388)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만폭동>, 비단에 담색, 세로 33cm 가로 22cm, 서울대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