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민족의 아름다움② 남산(2) - 윤경렬
글쓴이 : 관리자     첨부파일 :       날짜 : 02-06-06    조회 : 2551
  


남산의 불상을 돌았더니 부처님도 따라 돌며 한 줄기 향으로 단비를 내리게 했으니


골입구에 있는 마을 이름이 용장으로 전해오고 계곡 이름도 용장골이라 불려오는 것은 모두 용장사(茸長寺)에서 기인된 것이다. 용장사는 이 골짜기의 주인격일 뿐 아니라 남산의 전역(全域)에서도 손꼽는 대가람(大伽藍)이었다.
용장골에는 18개소나 되는 많은 절터(寺址)가 있지만 이름이 알려져 있는 곳은 오직 용장사지 뿐이다. 용장골의 남쪽 면은 수리산[高位山]을 절정으로 하여 열반계의 기암과 괴암으로 이루어진 봉우리들과 은적암(隱寂庵) 부근의 삼각봉들이 크기와 높이를 다투어 오른데 비해 북쪽 면에는 이렇다 할 잘생긴 봉우리가 별로 없다. 오직 용장사가 터잡은 봉우리만이 거대한 바위들로 첩첩이 쌓여 아득한 하늘 위에 솟아 올라 반대편과 균형을 잡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남쪽 면을 누르고 있는 봉우리의 우두머리격인 큰 봉우리이다.
은적암 골짜기에서 입구로 나와 동북쪽 산봉우리를 쳐다보면 흘러가는 구름이 걸릴 것만 같은 높은 바위산 봉우리 위에 샛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얗게 웃음짓는 삼층탑이 사람의 마음을 하늘로 끌어 올린다. 저 바위산 꼭대기를 지상의 수미산정(須彌山頂)이라 생각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용장사의 사지에 있는 축대들은 동서로 약 70여m되고 남북의 너비가 약40m되는 넓은 지역에 대소 11계단으로 쌓여져 있다. 금오산(金鰲山)을 후산(後山)으로 하여 남서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에서 가장 큰 봉우리를 주산(主山)으로 하고 있는 이 절터는 동쪽의 청룡산맥이 기암과 괴암으로 장엄하게 솟아 터를 한손으로 안은 듯이 감싸고 있다. 백호산맥은 조용하고 나지막하지만 올라서면 100여m의 험한 낭떠러지가 되어 밑에서 쳐다보면 높은 기상(氣像)이 있고 위에서 내려다 볼 때의 전망은 위엄을 갖고 있다.
앞을 내다보면 아랫세상은 시야에 아득하고 속세는 완전히 과거의 세상이 되어 버리고 새로운 하늘나라에 태어난 느낌이 든다. 앞을 향해 오른편에 8사지의 주산(主山)인 절벽바위가 기묘하게 솟아있고 왼편에는 은적암 부근의 삼각산이 기상높게 솟아있다. 양 봉우리 사이에 천룡(天龍)의 수리산이 본존불처럼 장엄하게 앉아 있으니 아마 이러한 터는 명당 중의 명당이 아니겠는가.
동쪽의 청룡산맥 위에는 봉우리마다 탑이 서고 불상이 새겨져 있으니 지금 3기(其)의 탑지(塔址)와 2좌(座)의 불상이 우적으로 남아 있다. 서쪽의 백호산맥 위에는 종각(鐘閣)이며 경루(經樓)가 솟아 있었을 것이고 탑도 솟아 있었다 한다.
“...황금궁전이 칠보로 장엄되어 천층이나 높아서 반공중(半空中)에 솟아 있다. 이와 같이 궁전이 층층으로 세워져 극락세계에 차 있는데 그 전각(殿閣)마다 일곱 겹으로 보배 난간이 둘러 있고 일곱 겹으로 보배 그물이 둘러쳐져 있는데, 통하는 길마다 보배 나무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 이것들이 모두 금, 은, 유리, 자거, 마노, 산호, 호박 등의 칠보로 되어 곳곳마다 그 웅장한 경치를 한 입으로 말할 수 없으므로 극락이라 하느니라.”
용장사터에 전각이 서 있던 옛 모습을 상상에 그려보면 역시 웅장하였던 그 모습은 극락에 못지 않았을 것이리라 믿어지는 것이다.
  
용장사 삼층석탑은 용장사를 감싸고 뻗은 동쪽 산맥 위에서 가장 높게 보이는 봉우리에 서 있다. 기단 밑에서 삼층 옥개석(屋蓋石)위까지 4.5m가 되는 작은 탑이지만 용장사에서 가장 장엄한 위엄을 나타내는 유물이다.
이 탑은 용장골에 들어서면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어느 곳에서 보나 한 번 올라가 보고 싶은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위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탑의 모양도 신라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석가탑 양식이며 틀리는 점은 하층기단부터 세운 점이다.
용장사는 신라시대 유가(瑜伽)의 조사(祖師)인 대현(大賢)법사가 주석한 곳이다. 대현스님은 통일신라 중엽「성유식론학기」(成唯識論學記)를 위시한 많은 책을 저술하여 당나라에까지 이름을 떨친 위대한 스님이었다.
경덕왕 12년(753)여름날이었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 곡식이 모두 말라죽게 되었으므로 임금은 대현스님을 대궐에 불러 「금광명경」(金光明經)을 강하게 하여 단비를 빌게 하였다. 부처님께 재를 올리기 위해서 공양의 제물을 차려 놓았으나 정수(淨水)그릇에 물이 없어서 재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대궐 부근의 우물들이 모두 말랐기 때문에 먼 곳으로 물을 길으러 갔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현스님은 향로에 향을 피워 받쳐들고 잠깐 묵념하고 있으니 메마른 우물 속에서 갑자기 물이 솟아 오르는 데 일곱 길이나 높이 쏟아져 나왔다 한다.
  
당시 이렇게 이름 높던 대현스님이 용장사에 오랫동안 계셨던 것이다. 이 절에는 높이 4m 가량이나 되는 돌로 다듬은 미륵상이 있었는데 대현스님은 늘 미륵상 둘레를 도는 예배를 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미륵상도 대현스님을 따라 머리를 돌렸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려있다.
대현스님이 그 주위를 돌던 미륵상이 삼륜대석(三輪台石)위의 불상같기도 한데 옷차림이 미륵보살이 아니다. 그러나 후대에는 세간에서 불상을 모두 미륵이라 부른 시대도 있었으니 삼륜대좌불상은 대현스님이 돌던 그 불상이라 할 수도 있겠는데 그 머리가 없어졌으니 더욱 안타까운 느낌이 든다. 사람들은 대현스님은 청구사문(靑丘沙門)이라 하였는데 대현스님이 용장사에 주지로 계셨으니 용장사는 경덕왕 이전부터 있던 절이었다는 것을 믿게 된다.

윤경렬 <불일회보, 1987년 6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