慶州紀行의 一節 (2) - 고유섭
글쓴이 : 관리자     첨부파일 :       날짜 : 02-04-18    조회 : 2270
3. 돌의 문화는 하필 新羅뿐이랴만


  
인류의 역사는 돌에서 시작되느니 신라의 문화만이 어찌 돌의 문화랴 하랴. 原始石器時代의 문화란 어느 나라에나 있던 것이요, 돌의 문명이란 어느 나라에나 있던 것이 하필 신라만의 문화가 돌의 문화라 하랴. 肅愼도 靺鞨도 濊貊도 夫餘도 高句麗도 百濟도 기타 그 어느 나라도 모두 돌의 문명을 가졌었다. 그러나 그들의 돌의 문화는 「쌓는 文明」이요 「새기는 文化」가 아니었으니, 돌은 새겨지는 곳에 문화적 발달의 極限을 본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를 남긴 것으로써 신라문화의 특색으로 알지 마라. 만일 統三의 主體가 신라가 아니었고 고구려였어도 또는 백제였어도 그들은 의당 돌을 새기는 문화를 남기었을 것이다. 고구려와 신라를 空間的으로 비교치 마라 -- 觀念的으로만 대립시키지 마라. 신라에는 통일 이후라는 新世代가 연결되어 있고 고구려는 統三 이전이란 舊期에 속하여 있으니 世代差를 無視하지 말라. 고구려와 同世代의 舊期의 신라는 고구려와 같이 「새기는 문화」를 아직 갖지 못하였던 것을 史家야 잊지 마라. 백제도 또한 그러하니, 그러므로 三國期의 朝鮮의 문화는 돌을 쌓는 곳에 그친 文明世代이었고, 統一前後부터 새기는 문화가 발전되었으니 신라의 문화를 전체로 새기는 문화로만 알지 마라. 舊期의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다름없는 築石의 문화이었느니라.
「쌓는 문명」에서 「새기는 문화」로의 展開. 이것은 石器文明 進展의 必然相이니 이것은 실로 新羅民族의 고유한 특징이 아니라, 통일 이후의 朝鮮文明의 특색이었다. 돌을 쌓는 문명을 止揚하고  遮遣하고 돌을 새기는 문화에로의 진전은 그러나 조선문화만의 역사적 진전의 必然相이 아니라 또한 世界文化의 진전의 共通相이니 어찌 新羅民族만의 固有相 이요 特有相규이라 규정할 수 있으랴. 우리는 모름지기 이 「새기는」階段의 문화를 세계인류문화사의 一係聯 속에서 이해할 것이요 결코 신비로운 민족성의 성격만으로 이해치 말자.
  돌을 「쌓는 문명」에서 돌을 「새기는 문화」로의 진전은 그 자체로서 돌의 문화를 부정할 矛盾的 契機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니, 다음에 나설 문화가 鐵類의 문화임이 틀림없으나 鐵은 마침내 殺伐의 利器로 惡魔化하고 東洋에 있어서의 진정한 문화의 계단은 특히 조선에 있어서의 문화의 階級은 흙의 문화가 대신코 나섰으니 이는 조선으로 하여금 현실적으로 불행케 한 가장 중요한 원인의 하나이었을 것이나 예술적으론 情緖의 高揚을 본다. 돌의 문화에서 흙의 문화로의 轉換은 조선의 문화가 遠心的 문화에서 求心的 문화로의 전환을 뜻한다. 경주를 보고 松都를 보라. 松都에는 깨어진 흙의 문화(陶磁)가 흩어져 있고 경주에는 새겨진 돌의 문화가 흩어져 있으니, 兩朝의 문화는 이로써 비교된다. 裝幀의 색채로써 비유한다면 경주의 문화 신라의 冊子는 赤地에 金字로써 표시하겠고, 松都의 문화 고려의 冊子는 靑地에 黑子로써 표시하리라.(이곳에 銅鐵器文化는 除略하였다. 이것은 三代文化를 規範으로 하던 李朝에서 논할 것임으로써이다.)


  4. 慶州에 가거든

  
경주에 가거든 文武王의 偉蹟을 찾으라. 구경거리의 경주로 쏘다니지 말고 문무왕의 精神을 기려 보아라. 太宗武烈王의 偉業과 金庾信이 勳功이 크지 아님이 아니나 이것은 文獻에서도 우리가 가릴 수 있지만 문무왕의 위대한 정신이야 말로 경주의 유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니 경주에 가거들랑 모름지기 이 문무왕의 유적을 찾으라. 乾川의 富山城도 南山의 新城도 安康의 北兄山城도 모두 문무왕의 國防的 經營이요, 鳳凰台의 高台도 臨海殿의 雁鴨池도 四天王의 護國刹도 모두 문무왕의 政經的 治積이 아님이 아니나 무엇보다도 경주에 가거든 東海의 大王岩을 찾으라.
  듣건대 대왕암은 동해에 있으니 경주서 약 60里. 가는 도중에 峻嶺을 넘고 길은 또 소삽타 하며 長長夏日의 하루가 壯丁으로도 역시 부족하다 하기로 京城을 떠날 때 몹시도 걱정스럽더니 막상 當地에 當到코 보니 문명의 利器는 어느 새 이 곳도 뚫어내어 11월 중순의 짧은 날도 거리낌없이 壯途(?)에 오르게 되었다. 덕택에 중간의 古蹟風光은 문자 그대로 走馬關山格이어서 이것은 芬皇塔, 저것은 皇福塔, 돌고 있는 곳은 明活山城의 아래이요 저 건너 보이는 것은 瓢岩이로세. 저 속이 高仙寺요 그 안에 무장사 --  언듯언듯 보이고 지나는 대로 설명이 귀를 스칠 때 車는 黃龍商山을 넘어 멀리 동해에 바랄 듯 -- 九曲羊腸의 險路를 멋적고 危殆히 흔들고 더듬는데 生死를 헤아리지 않는다 해도 나의 다리는 機械的으로 物理的으로 오그라졌다 퍼졌다 --.
  險關을 벗어난 車는 마음놓고 다시 大地를 달린다. 이리 꾸불 저리 꾸불 꾸불꾸불 도는 길이 溪谷의 北岸을 놓치지 않고 꾸불꾸불 뻗고 있다. 溪谷은 조선의 계곡이라 물이 흔할 수는 없지마는 넓은 幅原에 그 많은 자갈돌은 심상치 않은 이야기를 가진 듯이 그 사이로 溪南의 山陰에는 翠松丹楓이 한 景을 지어 있고, 溪北의 南敞에는 竹林이 어우러져 있다.
  저 골은 祗林寺로 드는 골이요 이 내는 石窟庵으로 통하는 길이라 군데군데 설명을 귀담아 듣다가 魚日서 차를 버리고 廣坦한 水田大野를 東으로 南으로내려가면서 山勢와 水路를 따지고 살펴보니, 아하, 이것이 틀림없이 東道大海로 통하는 行舟의 大路이었구나 깨닫게 되고 깨닫고 보니 다시 저 계곡이 窮한 곳에 石窟佛庵이 동해를 굽어 뚫려 있고 이 溪流가 흘러 퍼져진 곳에 感恩大寺가 길목을 지켜 이룩됨이 결코 우연치 않음이 이해된다.
  
設에 문무왕이 昇遐 후 -- 燒身化龍하사 국가를 鎭護코자 이 感恩大寺의 금당체하로 드나들어 동해를 보살폈다니 지금은 寺觀의 莊嚴을 비록 찾을 곳이 없다 하더라도 퇴락된 往時의 초체하엔 심상치 않은 그 무엇이 숨어 있을 듯하다. 寺門까지는 蒼波海流가 밀려들 듯하여 寺域高台와 門前平地가 엄청나게 그 水平을 달리하고 荒廢된 金堂左右에는 雙基의 三重 石塔이 半空에 솟구치어 있어 아직도 그 늠름한 자태와 호흡을 하고 있다. 寺名의 感恩은 물론 文武大王의 憂國聖慮를 感祝키 위한 것일 것이요, 護國龍王이 金堂大穴에 隱現코 있었다 하니 金堂이 역시 龍堂이라. 住山을 龍堂山이라 함이 또한 그럴 듯하나 利見臺는 찾지 못하였고 海賊이 感恩寺의 大鐘을 運輸하다가 魚藏코 말았다는 大鐘川口에 漁村部落이 제대로 오물조물히 엉켜져 있다. 塔頭에서 동해는 指呼間에 보이고 大王이 聖體를 燒散한 大王岩小島는 눈앞에 뜨나 波光의 反射가 도리어 眩亂하니 바닷가로 나아가자.
  바닷가로 나아가자, 내 大海의 風光에 굶주린 지 이미 오래니 바닷가로 나아가자. 백사장이 蒼海를 변도리치고 있는 곳에 靑松은 海風에 굽어 있고 玄穹이 限없이 둥그러있는 곳에 海面은 제멋대로 펼쳐져 있지 아니하냐. 白帆이 아니면 海天을 分揀할 수 없고, 白波가 아니면 藍碧을 가릴 수가 없다. 갈매기소리는 波濤 속에서 넘나 떠있고 까막까치의 소리는 岸頭로 떠돌고 있다. 大鐘川口에서 海苔가 끼인 寄岩에 올라 潮風을 들이마시고 부서지는 蒼波白潮 속에 발을 담그며 대왕암 孤島를 撮影도 하여 본다. 이미 시들은 지 오래인 나의 가슴에선 詩情이 다시 떠오르고 眼盲이 된지 오래인 나의 眼底에는 五彩가 떠오르고 이름 모를 律呂는 내 五官을 흔들어 댄다. 案內의 村夫, 나의 이 韻을 깨달았던지 村에 들어가 麥酒 1병을 가져오니 冷酒一杯는 진실로 의외의 饗應이었고, 平生에 잊히지 못할 洗浴濯塵劑였다.  

大王의 憂國聖靈은
燒身後 龍王되사
저바위 저길목에
숨어들어 계셨다가
海天을 덮고나는
賊鬼를 調伏하시고

憂國至誠이 重코 또 깊으심에
佛堂에도 들으시다
高臺에도 오르시다
後孫은 思慕하야
龍堂이요 利見臺라더라

英靈이 幻現하사
晝二夜一 竿竹勢로
浮往浮來 傳해주신
萬波息笛 어이하고
지금에 感恩孤塔만이
남의 애를 끊나니

大鐘川 覆鐘海를
烏鵲아 뉘지 마라
蒼天이 無心커늘
네 울어 속절없다
아무리 微物이라도
뜻있어 운다 하더라.


<《高麗時報》, 1940년 7월 16일, 8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