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배 - 예용해
글쓴이 : 관리자     첨부파일 :       날짜 : 02-04-05    조회 : 4889
  
흉배는 조선시대에 위로는 왕에서부터 아래로는 종8품의 말직에 이르기까지 모든 벼슬아치들이 입어야 했던 관복의 앞과 뒤에 달았던 것으로 깁 바탕에 여러 가지 무늬를 수놓았던 신분의 표지다. 따라서 만조백관이 우글거리는 조정에서도 흉배로써 벼슬의 높고 낮음을 누구나 쉽게 가릴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공식 기록에 맨 처음으로 흉배 문제가 오른 것은 세종 26년인 서기 1444년이다. 명나라로부터 임금의 옷을 받았는데 거기에 흉배가 따랐던 것이다. 그로부터 두 해 뒤에 다른 벼슬아치들의 관복에 흉배를 붙이게 할 것인지를 놓고 논란이 일었으나 그때의 영의정 황희가 반대하여 실현되지 못했다.
이 일을 두고 우의정인 하연과 우참찬인 정인지 들은 평소에 입는 옷은 화려해서는 안되나 조정의 관복은 벼슬의 높고 낮음을 쉽게 가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예의에 맞는 일인데 조복과 공복은 이미 그렇게 되어 있는 바이나, 달마다 있는 조회와 조계와 임금이 베푸는 잔치에서는 옷차림이 혼동되고 신분의 높고 낮음을 쉽게 가릴 수가 없어서 불편하니 저마다의 품계에 따라 흉배를 붙이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황희는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사치스런 것을 억누르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무엇보다도 앞세워야 할 일로써, 그 아니더라도 나라에 글만 지나치게 소중히 아는 폐가 있어서 걱정이다. 흉배에 쓰이는 비단은 국산이 아니니 두루 갖추게 하기가 어렵다. 또 계급의 높고 낮음은 이미 금·은·각대로써 제도화되었는데 굳이 흉배를 더해야만 가릴 수 있단 말이냐? ‘오랑캐들도 흉배를 하고 있으니 본국인 우리가 그들에 미치지 못할 수가 있는가’라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우리는 본디 예의의 나라로서 어찌 화려한 것을 다투고 부귀를 자랑할쏘냐? 조복은 오직 정결한 것으로 족하다”라고 우겨서 임금도 그 뜻을 좇았다.
그와 같은 일이 있은 다음으로 단종 2년에 다시 흉배를 쓰자는 우김이 나와 마침내 문·무반에서는 다 같이 흉배를 달되 무의의 경우에는 대군은 기린, 도통사는 사자, 군호를 지닌 신분은 백택을 저마다 달도록 하고, 문관은 1품은 공작, 2품은 운학, 3품은 백학을 저마다 달도록 했으며, 무관은 1·2품은 호표, 3품은 웅비, 대사헌은 해치를 달도록 했다.
그것은 조선왕조가 독창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명나라의 제도를 따랐던 것인데 그나마 ‘신하 나라’인 처지라 두 등급을 낮추어 명나라의 3품이 쓰던 흉배를 우리나라에서는 1품이 쓰도록 했다.
그때에 제정된 흉배제도를 두고 세조에 이르러 다시 개혁론이 고개를 들었다. 곧, 원나라의 사신이 오면 그들과 우리나라 재상을 가리기가 어렵다는 것이 그 첫째 이유였다. 그러나 그때에 어떻게 고쳐졌는가 하는 것은 직접적인 사료에서는 아직 보지 못했고, 다만 같은 무렵에 된 『경국대전』과 같은 간접 사료로써 대군은 기린, 왕자군은 백택, 문반 1품은 공작, 2품은 호표, 당상 3품은 웅비를 달았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다가 동서 양반이 1품에서 9품까지 두루 흉배를 갖출 수 있게 된 것은 연산군 11년인 1505년에 이르러서였다. 문·무반 당상 3품 위로만 달았던 흉배를 당하 3품에서 9품에 이르기까지 늘려서 달게 하면서 흉배의 무늬도 명나라의 것을 본뜨지 않고 우리가 만들었다. 곧 새로운 무늬로써 돝, 사슴, 따오기, 기러기 따위를 수놓도록 하였다.
이윽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치르고 병자호란까지 겹치자 그 전란통에 흉배를 달고 거들먹거릴 겨를이 없다가, 숙종 때에는 무신이 문신들이 쓰던 흉배를 달기도 했다. 영조 때에 이르러서는 당상, 당하관의 계급의식이 흐려지고 또 벼슬도 많이 늘어나서 위계질서에 혼동이 일게 되었다. 그러자 문반의 당상관은 운학을 달고 당하관은 백학을 달 것을 『속대전』에서 명시하게 되었고, 그 제도는 구한말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고종 때에 나온 『오례편고』에 따르면 문관의 당상관은 쌍학을, 당하관은 단학을, 무관의 당상관은 쌍호를, 당하관은 단호를 달았는데 1895년에 신식 군복을 제정함으로써 흉배 제도는 없어지게 되었다.
신하들이 그 벼슬의 표지로 달았던 것은 흉배라 했으나 왕과 왕비 및 왕가에서는 꾸밈새를 달리하여 보라 일컬었다. 신하들이 네모난 흉배를 달았던 것과는 달리 임금은 지름이 18센티미터쯤 되는 둥근 보랏빛 비단에 여의주를 입에 물고 구름 사이에서 용솟음치는 다섯 발톱을 가진 용을 금실로 수놓아 가슴과 등과 두 어깨에 달았으며, 왕세자는 발톱이 네 개인 용을 수놓은 것을 달았다. 왕비는 대례복인 적의나 원삼에 왕의 것과 같은 발톱이 다섯인 용을 수놓은 보를 달았으며 세자비 또한 발톱이 넷인 용을 달았으나, 소례복인 원삼에는 보 아닌 봉 흉배를 가슴과 등에 달았다. 대군의 흉배도 금실로 기린을 수놓은 것인데 조선 말엽에 고종의 친아버지였던 흥선대원군은 기린 대신에 거북으로 무늬를 바꾸어 사용하기도 했다.
  
지금 시중에 나돌고 있는 흉배들은 거의가 조선 말엽의 것인데 그것들로써는 흉배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정확한 자취를 가리기가 어렵다. 『조선왕조실록』을 위시하여 『경국대전』, 『속대전』, 『오례편고』, 『문헌비고』와 같은 여러 문헌에 적힌 사실과 오랜 집안에 전해져 내려오는 연대가 확실한 흉배 및 나라 안팎에 흩어져 있는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흉배와 같은 물증을 종합적으로 고찰하고, 그와 더불어 흉배의 바탕이 된 천의 종류와 거기에 수놓인 수실이며 색실의 물감이며 수의 기법과 무늬들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서 체계적인 정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우리나라의 수는 궁수와 민수로 크게 나뉘는데, 민수는 지방에 따라 안주수니 정주수니 하여 여러 갈래로 나뉘어 저마다 그 특색이 다르다. 따라서 흉배의 편년과 지역적인 특질을 가려내고 시대적인 기법과 색상의 변천을 밝히는 것은 결코 손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색상만 해도 분, 먹, 삼청, 분삼청, 주홍, 다홍, 자홍, 장단, 장단육색, 주홍육색, 감청, 진감청, 하엽, 양록, 백록, 황, 분황, 석황, 석간주, 다자, 분홍, 황연 따위로 다채롭기가 이를 데 없다. 그렇게 다채로운 색실로 마름질, 도듬질, 날림, 계화, 시분, 골사, 샛긋기, 빗긋기의 표현으로 얽음수, 사슬수, 매듭수, 평사수, 솔잎수, 점수법과 같은 기법을 써서 놓아 하나의 흉배가 이루어진다.
조선시대에 당하관인 문관이 달던 단학 흉배를 보기로 들면, 아래로 삼산이 솟고 산 사이에는 다섯 빛깔의 파도가 일렁인다. 삼산 마루에는 영지가 힘차게 돋아났고 그 위로 무지갯빛 구름이 하늘을 가득 머흐르는 속에 두 다리를 뻗고 두 나래를 한껏 편 채로 구천을 힘차게 나는 한 마리 학의 부리에는 불로초가 물려 있다. 학의 나래가 희고 다리와 부리가 검고 머리 위가 붉은데, 한 점의 검은 점으로 표현된 눈에서는 금세 정기가 광채를 낼 듯하여 희고 검고 붉은 극단적인 색의 대비를 오히려 차분히 가라앉힌다. 아마도 조선시대의 어느 규방 깊숙이에서 벼슬길에 나선 낭군의 영달을 염원하는 애틋한 마음으로 한 바늘 한 바늘 수를 놓았을 다소곳한 여자의 손길이 눈에 선하다.
또 임금의 금실 빛이 눈부신 보의 다섯 발톱을 지닌 용을 보고 있노라면 천하에 군림했던 임금의 위세와 함께 평생을 구중궁궐 속에 갇혀 날이면 날마다 속절없이 수바늘을 벗으로 한 속에 늙어갔을 수방상궁의 굽이굽이 맺힌 한이 서려 있는 듯도 하여 마음이 섬짓해지기도 한다.
왕이나 왕비가 썼던 보는 말할 것도 없고 1품 벼슬의 고관대작에서부터 9품 벼슬의 하찮은 말직에 이르기까지 달았던 흉배에 얽인 그 나름대로의 영고와 성쇠의 인간적인 사연들은 그 수효가 끝이 없겠으나, 정작 오늘날에 전하는 보나 흉배는 그런 인간의 영위의 자국은 말끔히 떨어버리고 오직 수의 아름다움만으로 목숨을 유지한다. 하기야 왕위나 눈부신 벼슬도 백성이 있고 난 다음의 일이요 그가 누렸던 영광과 세도도 백성으로부터 우러났던 것임에 생각이 미치면, 보와 흉배가 간직했던 상징의 뜻은 낡아버리고 수의 아름다움만이 오늘날까지 목숨을 버티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세상일의 귀결인지도 모른다.
(1979년 10월)

〈예용해, 《민중의 유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