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 예용해
글쓴이 : 관리자     첨부파일 :       날짜 : 02-02-22    조회 : 2612
  
카랑하게 개인 겨울 하늘에는 하늬바람이 언제나 세차게 휘몰아치고 있다. 산과 들은 흰 눈으로 덮이고 마른 가지와 풀잎들은 꽁꽁 얼어붙어서 지리하고 음산한 겨울이 가고 새봄이 찾아들 때까지 오랜 겨울잠을 잔다. 이렇게 온 누리가 동장군의 드센 위세 앞에 움츠리고 있을 때 오직 연만이 드높이 치솟아 바람을 안고 하늘을 휘저으며 유유히 노닌다. 뭇새도 날아다니기를 꺼리고 짐승도 둥지에서 떠날 줄을 모르는 한겨울의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고 떠다니는 연의 발랄한 생기가 없었던들 우리의 겨울은 너무나 삭막했을 것이다.
연은 지연, 풍쟁, 풍연 따위로 불리며 정월 초하루에서 대보름까지의 보름 동안만 날렸다. 만약 정월 대보름이 지나서도 연날리기를 하는 어른이나 아이가 있으면 핀잔을 받아야 했는데, 심지어는 그 무렵으로서는 큰 욕이 되었던 ‘고리백장’이라는 놀림을 받기도 했다.
대개 세밑이 되면 어른이나 아이들은 호롱불을 돋우어가며 대쪽을 쪼개어 연살을 만들고 어머니나 할머니를 졸라서 고운 닥종이와 실을 얻어내어서 연을 마련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산적가치 굵기의 대를 가로와 세로로 맞추고 거기에 또 모로 엇맞추어 붙여서 그 대살에 가운데를 둥글게 오려낸 종이를 바른 다음에 명주와 무명실을 꼬아서 벌이줄을 맨다. 또 연싸움에 이기려고 사금파리를 곱게 빻아서 가루를 만든 것이나 유기점 같은 데서 구릿가루를 얻어서 된밥풀에 이겨 연실에 올린다. 이것을 ‘갬치 먹인다’고 한다.
이렇게 연실이 마련이 되면 그것을 얼레에 감아둔다. 얼레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서, 가운데에 긴 막대기로 손잡이를 달고 그 좌우에 날일자로 울타리를 짠 것에서부터 여섯모, 여덟모, 열두모로 둥글게 우리를 짜듯이 한 것에 이르기까지 갖가지다. 또 그런 연장이나 솜씨가 없는 아이는 어머니 반짇고리의 실패를 몰래 들어내러 얼레로 쓰는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연은 언제부터 띄우기 시작했을 것인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문헌에 나타난 연에 대한 이야기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은 『삼국사기』에 적힌 것으로서, 신라 진덕여왕 1년 곧 서기 647년에 김유신 장군이 역적 비담과 염종의 반란을 무찌를 때 연을 썼다는 것이다. 그러니 연이 이때보다 더 오랜 옛날부터 있어왔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가 있는 일이다.
이와 같은 기록에 뒤이어 고려시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최영 장군이 북쪽 오랑캐들의 반란을 쳐부술 때에 연을 썼다는 기록이 있어서, 연이 싸움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역사의 기록은 그렇다하더라도 널리 여염에서 놀이로서 날렸던 것을 싸움 마당에서 썼다고 풀이하는 것이 온당한 일일 것 같다. 또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영조 임금이 여염에서 연을 날리고 있는 것을 대궐 안에서 구경하며 즐기고 또 연날리기를 장려하였다. 따라서 그때부터 연날리기가 곳곳에서 놀이로서 성하게 되었음을 알 수가 있겠다.
  

우리 연은 긴네모꼴 아니면 바른네모꼴로 되어 있고 연 가운데 둥근 구멍이 뚫린 것이 특징이다. 이웃 중국이나 일본의 연들은 물고기꼴이나 새 또는 사람꼴을 하고 있어서 우선 겉보기는 화려한 듯하지만 조잡스럽고, 또 가운데 구멍이 없어서 하늘에서 우리 연처럼 위아래나 좌우로 마음대로 날지 못하는 흠이 있을 뿐더러 연의 몸이 상하기가 쉽다. 이렇게 생긴 생김새가 다 비슷해 보이는 우리 연도 따지고 보면 그 종류가 얼추 일흔 가지쯤에 이른다.
곧, 연의 몸에 색지를 바르거나 아니면 물감을 칠하는 꾸밈새에 따라서 이름이 달라진다. 이를테면 꼭지연·반달연·치마연·동이연·초연·박이연·발연 따위로 크게 나뉘는데, 꼭지연은 연의 이마받이에 둥근 색종이를 오려 붙였거나 물감으로 그린 것으로 색에 따라서 먹꼭지·청꼭지·홍꼭지·금꼭지·쪽꼭지 따위로 이름이 다르다. 반달연은 연의 이마에 반달 모양을 붙이거나 그린 것으로 이 또한 색에 따라서 먹반달, 청반달, 홍반달, 임반달, 쪽반달로 불린다. 치마연은 연의 위는 희고 아래는 색이 있는 거승로서 이도 빛깔에 따라 먹치마·황치마·보라치마·이등치마·삼등치마·사등치마 따위로 나뉘며, 동이연은 연의 머리나 허리를 동인 것으로서 그 동이는 빛깔에 따라서 먹머리동이·청머리동이·홍머리동이·보라머리동이·반머리동이·실머리동이·눈깔머리동이·허리동이·눈깔허리동이로 불린다.
그런가 하면 초연은 연의 꼭지만 남겨놓고 한 빛깔로 칠을 덮은 것으로서 그 빛깔에 따라 먹초, 청초, 홍초, 황초, 보라초 따위로 불린다. 박이연은 연의 온몸이나 아니면 어느 부분에 무늬를 놓은 것으로 그 무늬의 생김새에 따라 돈점박이, 귀머리장군긴코박이, 눈깔머리장군, 눈깔귀머리장군긴코박이 따위로 나누어진다. 발연은 연의 가장 아래쪽이나 좌우의 가장자리에 발과 같은 것을 붙인 것으로서 그 생김새에 따라서 사족발, 국수발, 지네발 따위로 불린다.
사람이란 땅에서 떨어져 살 수가 없거늘 사람이 만든 연은 하늘 가장자리에 드높이 떠서 누리의 온갖 것을 굽어보며 바람을 안고 마음대로 오간다. 나라 안의 모든 백성들이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입에서 영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었을 절대권자이던 영조 임금도 겹겹이 담장으로 둘러싸인 궁궐 안에서 마음대로 하늘에 떠다니는 온갖 연을 쳐다보면서 필시 연의 아무런 거침이 없는 자유자재함이 무척이나 부러웠을 것이다.
나라의 임금에게도 그러했거늘 절대 신분사회이던 조선시대의 백성들이야 오죽하였을까? 그들은 정월 보름까지의 얼어붙은 하늘 아래에서 스스로가 띄운 연의 자유롭고 거침이 없는 몸놀림에 온갖 소망을 걸고 그 성취를 바라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보름날이 되면 저마다 액연 또는 액막이연이라 하여 연의 등에다 한자로 재앙 액 자를 쓰거나 아니면 송액, 송액영복 따위의 글귀를 써서 높이높이 띄우고 실을 끊어 멀리멀리 날려보내면서 한 해의 불행이 그 연과 함께 사라졌다고 믿었던 민속을 달리 풀이할 길이 없을 것 같다. 액막이연의 민속이 무지몽매한 백성들에게 뿐만 아니라 그때의 식자층에게도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음은 『조선왕조실록』에 명종 21년인 1566년에 장안에서 띄운 액연이 대궐 안에 떨어져서 궁안이 벌집을 쑤셔놓은 듯 법석을 부렸다는 기록을 미루어도 알 수가 있다.
못둑이나 뒷동산 마루나 아니면 허허하게 넓은 들판에서 바람을 지고 늙은이나 젊은이나 코찔찔이 아이나 저마다 다른 꾸밈새의 연을 저마다의 뜻과 솜씨대로 날리는 풍경을 이제는 좀체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어쩌다가 연싸움이 열려서 서로가 상대의 연줄을 끊고자 연을 치솟게도 했다가 곤두박질을 치게도 해보고, 왼편으로 슬쩍 비켰다가 바른편으로 누이기도 하며 온갖 은밀한 기량을 부려서 보는 사람의 손에 땀을 쥐게 하던 아슬아슬한 광경은 더욱더 볼 수가 없다.
그리고 어느 한쪽 연의 줄이 끊어져서 연이 금세 몸을 가누지 못하고 멀리 가장자리로 뒤뚱이면서 날아갈 양이면 어린것들은 그 연을 줍고자 콧물을 훌쩍이며 연신 바짓말을 끌어올리며 줄달음질을 쳤다. 끊어진 연을 줍는 사람이 임자라는 것을 그들은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숨을 헐떡이면서 10리고 20리고 뜀박질을 하며 요행을 좇는다. 그것이 백이면 백 모두가 헛된 수고로 끝나는 줄 알면서도 연신 달음박질을 재촉한다.    (1979년 1월)

〈예용해 전집2,《민중의 유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