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입사 동제정병 - 최순우(전 국립중앙박물관장)
글쓴이 : 관리자     첨부파일 :       날짜 : 02-01-24    조회 : 2892
  
'맵자'하다는 말이 에누리 없이 그대로 쓰여서 조금도 과장이 없다고 한다면 아마 이러한 고려 청동 정병이 지니는 날씬하고 세련된 매무새 같은 것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정병은 원래 불교를 따라 중국에 들어온 '군듸카'라는 불기(佛器)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것이 한국에 들어온 후 고려시대에 그 세련의 절정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동제 정병뿐만 아니라 청자정병도 유행해서 그 형태의 아름다움이 중국 정병이나 인도 정병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세련되었으며 청동제 정병에는 은입사, 청자 정병에는 청자상감 같은 특이한 장식기법을 써서 그 형체의 아름다움에 곁들인 무늬의 효과가 한층 아취를 더해주었다. 이 정병은 바로 청동 바탕에 은실로 호수 언저리의 한가로운 자연 정취를 새겨 넣은 보기 드문 가작으로 지금은 녹이 나서 연두색으로 변색한 바탕에 수놓은 은색의 산뜻한 색채 조화가 우선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한다.
  
수양버들 긴 가지들이 산들바람에 나부끼는 늪가에는 갈대숲이 듬성듬성 우거지고, 물위에는 한가로이 떠 있는 산오리들, 하늘에는 늪으로 날아들고 날아가는 기러기떼와 오리들이 동양화다운 포치로 아취있게 새겨져 있다. 수양버들 밑으로는 노를 젓는 삿갓 쓴 인물이 두어사람, 하늘 저쪽에는 마치 구름처럼 보이는 먼 산이 있고, 손잡이가 되는 병목에는 구름무늬를 듬성듬성 장식했다. 곧바로 세워진 긴 부리는 물을 따르는 귀대이고 병 어깨에 붙은 마개 달린 병 입은 물을 넣게 마련된 것이다. 이 병 입에 달린 마개는 역시 은으로 투각한 유려한 당초문을 은으로 투각해서 씌우고 있다. 은입사라는 것은 청동제의 그릇 표면에 무늬나 그림을 새기고 새겨진 홈 속에 은실을 두드려 메워서 은색 무늬를 이루도록 고안한 기법이다. 이것은 마치 나전칠기에 자개를 오려서 박는다든가 또는 청자상감에 백토나 자토로 무늬를 넣는 기법과 함께 상감기법이라고 불리는 공예장식의 일종이다.
이러한 은입사 기법은 이미 먼 옛날 중국 전국시대에 시작된 기교이지만 한국에서는 고려시대의 불기 등속에 그러한 작품이 적지 않고, 따라서 우리나라의 은입사 기술은 고려시대에 최고로 세련되어서 청자상감의 발생에 자극을 준 것으로 보인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