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과 봉암과 적조탑 - 강우방(이화여대 교수)
글쓴이 : 관리자     첨부파일 :       날짜 : 02-01-10    조회 : 2338
  
문득 돌아서니 시야에 들어오는 봉암(鳳巖)의 빼어난 모습, 그 봉암에 머무는 구름들. 부동의 암봉을 무심하게 오락가락하며 순간 순간 변화무쌍하게 부유하는 구름은 의연한 봉우리와 너무도 대조적이어서 내 마음을 추연하게 한다. 지금까지 내가 산을 찾으면서 암봉을 보고 경탄하며 숙연해진 적은 이번이 세 번째이다. 그 첫째는 대학시절에 설악산(雪岳山)의 울산바위를 보았을 때였는데, 나는 그 암자에 머물면서 울산바위를 그렸다. 그 다음은 오윤(吳潤;1986년에 타계한 민중화가)의 조문(弔問)차 그 집을 방문했을 때, 그의 집 근처에서 올려다 본 북한산의 인수봉이었다. 그리고 나서 이 봉암이 세 번째인 것이다. 왜 유독 자연 속에서 나는 바위를 보며 놀라움과 경이감을 금치 못하게 되는 것일까. 아마도 바위를 신체(神體)로 삼아왔던 원시인의 감성이 내 피에도 흐르는가 보다.

스님 방에 앉아 문을 여니 희양봉(曦陽峰)과 봉암이 한눈에 들어 온다. 초가을 - 바람에 구름이 뭉쳤다가 흩어지고 흩어졌다가는 다시 몰려든다. 우람하고 기상 높은 봉황이 솟구치는 듯한 암봉은 마치 구름의 변화를 꾸짖는 듯 혹은 비웃는 듯하다. 저 구름의 무한한 가변성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상징한다면, 봉암은 부동(不動)의 여래(如來) 자리를 뜻하는 것일 게다. 저 뛰어난 자태, 우람한 모습,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부동의 모습, 그것은 바로 여래임에 틀림없다.

  
그 바위 아래로 절이 있으며 넓지 않은 마당에는 조그만 삼층석탑(三層石塔)이 호젖하게 서 있다. 혹자는 그 탑이 초라하다고도 하겠지만, 저 위협적인 큰 바위에 결코 저항하지 않겠다는 듯이 다소곳한 작은 탑이 그렇게도 편안하게 보일 수가 없다. 그리고 탑 뒤의 법당 터 한가운데는 역시 조그만 불상자리가 있다. 아마도 그 불상은 그리 크지 않은 철조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었으리라. 만일 장륙상(丈六像)같이 큰 불상을 앉혔었다면 결코 봉암과 어울릴 수 없었을 것이다.

깊은 산속에 있는 선사(禪寺)의 법당이나 탑이 조그마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아름다운 자연 그대로가 비로자나불인데 탑과 불상을 크게 만들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선승(禪僧)에겐 그러한 탑이나 불상조차도 아무 필요가 없을런지도 모른다.

산적해 있는 건축부재라든가 전기톱 기계소리가 요란한 것을 보고 불사를 일으키는 듯하여 늘 내 곁을 따라다니던 지상(智常)스님에게 지나는 말로 물었더니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다가 말한다. '많은 스님들이 떠났지요. 지금의 저 조그만 법당을 허물고 큰 법당을 짓는 걸 반대하다가 결국은 모두들 떠났답니다. 그것 때문에 논쟁이 여러 번 있었어요.' 그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아직도 그렇게 의연한 스님들이 계시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고 기뻤다.

마당 한가운데는 지증대사(智證大師)의 적조탑(寂照塔)과 비(碑)가 있었다. 그런데 그것만은 어찌된 일인지 매우 크고 우람하였다. 여래의 탑은 조그마한 데 비해 지증대사의 탑은 훨씬 컸으며 그 장식도 사자(獅子)·연화(蓮華)·비천(飛天)·사천왕(四天王) 등으로 장엄하였다. 아마도 석가는 멀리 지나간 부처요 지증은 생불(生佛)인 까닭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증도 원효(元曉)와 마찬가지로 중국에 가지 않고 도(道)에 이른 스님이었다.

  
지상 스님은 우리를 기연담(妓淵潭)으로 인도하였다. 희고 깨끗한 암반에 맑고 깊은 계곡, 그리고 내 모양을 보고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여기서 이러시는데 금강산(金剛山)에 가시면 어쩌시렵니까' 한다. 그 말에 문득 금강산에는 마애불(磨崖佛)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 산에는 마땅히 수많은 부처를 조각했어야 했건만 그렇지가 않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그토록 아름답고 기상어린 기암괴석(奇巖怪石)에 구태여 부처를 조각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수려한 자연 그대로가 부처요 곧 비로자나불인 까닭이다. 자연을 대하는 우리 민족의 감성과 그 예지로움에 나는 다시 한번 감복할 따름이다.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금강산에는 단원(檀園)이 즐겨 그렸던 거대한 묘길상(妙吉祥)이 하나 조각되어 있을 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인도나 중국에서처럼 온 산을 부처로 뒤덮는 번잡한 일은 하지 않는다. 자연 속에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며 반드시 있어야 할 자리에만 부처를 새겼다.

기연담의 위쪽에 위치한 백운대(白雲臺)도 무척 아름답고 좋았다. 연꽃을 든 부처님의 조각은 그늘 속에서 어렴풋이 그 자태를 지키고 있었다. 이러한 정취로 인해 봉암용곡(鳳巖龍谷)이며 봉암산사(鳳巖山寺)로군!

이 선경(仙境)을 뒤로하고 산을 내려오는 길에 나의 동반자는 무척이나 아쉬운 듯 뒤를 돌아보며 몇 번이나 발을 헛짚곤 했다. 우뚝 솟은 바위의 그 위용과 여래의 모습에 그 또한 감동을 잊지 못하고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산하는 길에 나는 타고르의 말을 생각했다. 그는 말하기를 고대 그리스의 문명은 '도시성벽' 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들의 사고 방식에는 늘 '분리(分離)'와 '지배(支配)'의 원리가 작용한다고 했다. 그러나 인도인은 숲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늘 환경과 더불어 성장하고, 도 환경과 결합함으로써 자기의 의식을 실현하며 또 확대해 나갔다. 숲 속에서 자연과 인간의 혈연관계를 느끼고, 위대한 조화를 실현하려 했다. 개아(個我)와 만유(萬有)의 일치가 인도정신의 변함없는 뼈대였다.

나는 왜 선사(禪師)들이 위대한 자연 속에 깃들면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했는지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것은 단순히 속세를 피하거나 불교에 대한 핍박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난번에 나는 부산에서 H시인을 만났다. 그는 요즘 들어 동료시인들을 만나거나 시를 쓰지 않는다고 하므로 나는 무슨 영문인가 싶어 할말을 잃었다. 시를 쓴다고 하여 모두가 시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봉암산사를 염두에 두면서 느닷없는 말머리를 끄집어냈다. ' 만일 신이 있다면, 자연은 신의 작품이고 예술은 인간의 작품이겠지요.'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 했는데, 오스카 와일드는 자연이 예술의 모방이라 했죠. 와일드는 예술지상주의자예요.'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의미있게 그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

나는 처음으로 이 산사에서 자연과 예술에 관한 진지한 문제를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인간은 신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석가(釋迦)가 태어나기 전에도 법(法)이 있었듯이, 저 우뚝한 봉암도 아주 오랜 영겁(永劫) 전부터 있었으리라. 저 하늘을 향하여 솟구치는 봉암은 시간의 개념을 초월하고 있으며 그것은 또한 원초(原初)로의 회귀(回歸)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서양의 진보주의는 미래지향적인데 반해 동양은 과거지향적인 사유를 지녔다. 석가조차도 부정하고 그 이전으로 돌아가서 원초에서부터 시작하려는 오만한 산사의 마음 - 그러한 선사의 마음을 기리기 위해 그 밑에다 적조탑을 세웠을 것이며, 그 위로는 순간 순간 변하는 현재적(現在的)인 구름이 무심하게 떠밀려 오고 가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강우방 선생님의 《미의 순례》에서 발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