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당대장 진찬(眞贊) - 강우방(이화여대 교수)
글쓴이 : 관리자     첨부파일 :       날짜 : 01-12-30    조회 : 2715
  
송운 사명대사(松雲 泗溟大師)는 기골이 장대한 것 같지는 않았으나 늠름한 기상이 얼굴에 응집되어 있었다. 조그만 머리가 차돌처럼 단단하며 가늘고 긴 날카로운, 비교적 큰 코, 굳게 다문 입, 여래의 것처럼 긴 귀 등 빈틈이 없었다. 짙은 남색의 턱수염은 허리까지 길게 드리워져 있었으며, 의자에 앉았으나 신발을 벗고 다리를 올려 결가부좌를 하고 있다. 두 손으로는 불자를 무릎 위에 받들고 있는데, 그것은 수염과 크기가 그 솜씨가 비슷하여 반복을 통해 수염의 존재를 강조하고 있다. 장삼의 옷자락과 옷주름의 묵선은 간결하며 탄력성이 있다.
누런 장삼에다 선명한 연지색 가사를 두르고 있는데 녹청색의 의자, 그리고 연지색 신발과 함께 어울려 전 화면이 강렬한 보색의 대비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황·적·녹색의 삼원색 보색 대비는 송운(松雲)의 국가와 민족에 대한 단심(丹心)을 표현한 듯하며, 그것은 입술의 표현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이어서 얼굴은 왼쪽으로 돌렸으나 입은 정면관(正面觀)이다. 입은 작고 윤곽이 뚜렷한데, 윗입술은 선명한 연지색이며 아랫입술은 짙은 연지색이다. 그의 굳건하고 열정적인 심기가 입술에 응결되어 있는 듯한다.
처음 그의 진영을 보았을 때, 그의 입술이 나의 온몸과 혼을 힘있게 끌어당기는 듯하여 나는 그의 초상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 후 사명대사의 얼굴에서 입을 왜 그렇게 강렬하게 표현했는지 늘 나의 뇌리에서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입술이란 우리말은, 꽃술을 화심(花心)이라 하듯 구심(口心)이란 뜻이라 한다. 그러므로 '술'이란 말에는 '중심·핵심’이란 상징적 의미가 있다. 그러나 내게는 입술은 입의 중심일 뿐 아니라 인격의 중심이랄 수 있는 마음이 반영된 것이라 생각된다. 아마도 그의 붉은 입술은 나라를 구하고자 갈구했던 뜨거운 웅변을 머금은 때문이었을 것이다. 망국의 위기에 처했을 때, 노선사(老禪師)는 홀로 변설(辯舌)로서 적중의 가토 기요마사[家藤淸正]를 힐책하여 심복시켰고, 담봉(談鋒)으로 적의 담(膽)을 부수어 절복(折伏)시켰으니, 무거운 악은 세력으로써 절복하고 가벼운 악은 도력(道力)으로 섭수(攝受)한다는 불문(佛門)의 가르침 그대로 행하였으되, 칼날로 못한 것을 한 치 혀로 이루었다 하겠다.
  
88년 10월 중순에 박물관 미술부는 동화사 및 은해사의 불화 조사에 나섰다. 조사 첫날 동화사에서 대면한 것이 마본(麻本)에 채색된 사명대사의 영정이었다. 그 영정을 처음 본 순간, 이처럼 나를 힘있게 끌고 압도하는 영정은 없었다고 생각되었다.
내가 그때까지 알고 있었던 사명대사란 그저 임진란 때의 승장이란 것뿐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글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초상화를 통하여 그를 알게 된 셈이다. 말하자면 거기에 표현된 정신이 나를 사로잡은 세인데, 그것은 형상을 잘 표현하지 않으면 전달되지 않는 것이리라. 화가의 비범한 필선과 설채(說彩) 등의 그림 솜씨를 통하여 송운의 정신에 접하게 된 셈이다. 송운을 충분히 이해한 화가가 아니라면 이렇게 표현하기 힘들 것이므로 아마도 이 초상화는 사명대사가 살아 있을 때의 초상화가 아닌가 생각된다. ‘가경원년(嘉慶元年, 1796)’이란 묵서가 의자 아래 쓰여 있기는 하나, 그 서체라든가 자리잡은 위치가 그림의 품격과 전혀 걸맞이 않아 아마도 후대에 누군가 가필(加筆)한 것 같다.
나는 대상의 신(神)과 작가의 신(神)이 상통하여 상호작용을 일으킬 대, 전신(傳神)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결국 작가의 정신과 기술이 문제된다. 여기 그려진 송운은 도대체 어떠한 인간인가. 그 당시 모든 백성이 놀라고 왕도 놀라워서 그가 누구인지 묻는다. 그러나 송운의 정신이 잘 표현된 이 진영을 누가 그렸느냐고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예술가의 존재이유가 있는 듯싶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분명히 송운의 정신과 통할 수 있었던, 역시 기상 있고 고매한 정신을 지닌 화가였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우리는 송운과 함께, 그림으로 그의 정신을 옮긴 전신(傳神)의 화가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그의 이름을 알 수 없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 없는 것이다. 《분충서난록(奮忠 難錄)》에 의하면, 그 당시 사람들은 송운이라는 유정(惟政)의 호를 즐겨 불렀다. 그것이 산인(山人)에 걸맞는 이름이기 때문일 것이다. 임진·정유 양란에 그는 팔도군총섭 의병장으로 임명되어 크게 활약하였는데, 그 때문에 이 영정이 사명당대장(泗溟堂大將)이라 이름붙여진 것 같다. 그리고 그의 모습에서 긴 수염이 매우 인상적이었던지 유몽인(柳夢寅)·윤봉조(尹鳳朝)등이 그를 묘사한 글에는 허리에 이르는 긴 수염만이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그는 주로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활약하였으며, 세 번 적진에 들어가 가토 기요마사와 문답하였다. 전후에 선조(宣祖)는 산인(山人)에게 국운이 걸린 것을 생각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강화하기를 간곡히 당부한다. 왕명에 의해 승려가 외국에 사신으로 간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돌아올 때 자력으로 조선인 포로 삼천여 명을 데리고 오니, 불교는 정혜(定慧)로 한 마음을 다스리고 자비로 만물을 제도한다고 하였는데 송운이 이를 스스로 실천한 셈이다. 그는 여래의 응화신(應化身)이었다.
  승려는 군신과 부자의 관계도 끊고 산림으로 도망하여, 이성(理性)을 떠나고 윤강(倫綱)도 버려서 불교를 이교(異敎)라 하였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으니 어찌된 셈인가고 유림(儒林)은 놀라고 한편 탄식하였다. 그리하여 오히려 유림은 세간의 큰 의리에 입각한 곳에 스스로 무상(無上)의 반야바라밀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유림의 그를 사모하는 마음은 송운이 일본에 갈 때 지어 바친 별장(別章)등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나는 대학생이었을 때 호남 일대를 다니다가 도처에 남긴 충무공의 자취를 만났는데, 지금은 영남에서 송운공을 만나 두 분을 경모(敬慕)하게 되었으니 기쁜 마음 억누를 길 없다. 그는 금강산, 팔공산, 청량산, 오대산, 태백산, 가야산 등에 많은 자취를 남겼다. 두 분 모두 언행이 곧고 진솔하여 전인(全人)의 모습을 보여준다. 남해의 다도해에서는 충무공이, 영남 산간에서는 송운공이 온갖 핍박을 받으며, 아웃사이더로서 위급의 나라와 민족을 구하였으니 생각해 볼수록 숙연해질 따름이다.

(이 글은 강우방 선생님의 《미의 순례》에서 발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