含資道摠管柴將軍精舍草堂碑片(3)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7-07-19    조회 : 6698
(2에서 계속)
 

시장군비를 통해 본 신라시대의 김천

 한편 시철위가 김천에 주둔하고 있었던 이유가 새삼 궁금해진다. 김천은 신라의 영토에 속하면서 백제와의 국경에 가깝기 때문에 백제의 침범을 막기 위한 전초기지로서 속문산성俗門山城, 고성산성高城山城, 감물성甘勿城 등의 산성이 곳곳에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신라는 659년에 백제가 자주 변경을 침범하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였는데, 이 때 변경은 신라 독산성獨山城과 동잠성桐岑城이었다.1) 이보다 앞서 647년에도 백제군이 무산성茂山城, 감물성, 동잠성 등을 공격하였다고 한다.2) 여기서 동잠성, 무산성, 감물성 등은 모두 지금의 김천 어느 지역 혹은 인근에 위치한 성들이었다.3)

  또한 조선시대에는 경상도와 충청도의 갈리는 곳에 놓여 있어, 청주淸州를 경유하는 일본사신과 우리나라 사신은 반드시 이곳을 지나가므로, 관에서 접대하는 번거로움이 상주尙州와 맞먹을 정도로 왕래의 요충지였다고 한다.4)

  결국 김천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삼국통일기에는 신라의 군사적 요충지로서 전초기지前哨基地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즉, 위의 기록에서 보이듯이 적의 침입시에는
  
1차 방어기지의 역할을, 반대로 적을 공격할 경우에는 최전선의 전투기지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신라 공격로나 660년 백제 멸망시 김유신의 백제 진격로, 667~668년 고구려 멸망시 신라군의 공격로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와 같이 군사적으로 중요했던 김천은 백제 멸망 이후 ‘백제여적百濟餘賊’이라 표현되는 백제부흥군을 진압하는 데에도 거점據點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백제 멸망시 가림도행군총관으로 참여했던 시철위가 백제 멸망 후 산발적인 백제부흥군을 진압하기 위해 김천 방면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더불어 당나라의 고구려 원정에 대비하여 모종의 임무, 즉 고구려 원정에 신라의 상응을 독려하거나 혹은 고구려 원정로 확보 등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시철위가 김천에 정사초당을 지은 까닭

  그리고 앞서 시철위가 김천에 주둔하며 정사초당을 세운 것은 그를 함자도행군총관에 제수한 황제의 은혜를 불법에 의지하여 기리기 위함이었다고 추정한 바 있다. 그러나 시철위가 정사초당을 세운 이유가 이 뿐이었을까 궁금해진다. 이에 대해 기존 연구자들이 몇 가지 가정을 제기하였는데,5) 그 견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장군이 백제 원정의 성공 이후 고구려 원정에 대비하여 모종의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정사초당을 세웠다는 가정이다. 둘째, 시장군이 백제부흥군과 싸우다가 어떠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정사초당을 지었다는 가정이다. 셋째, 그가 신병身病으로 불사佛舍를 짓고 요양했을 가능성이 있다. 넷째, 방유애房遺愛 모반사건(653)으로 자신의 유배와 동생 부부의 죽음 등 가문의 불행으로 충격을 입고 깊이 불심에 빠져든 그가 우리 땅에 그대로 남아 불법을 펴게 된 것은 아닐까하는 가정이다. 다섯째, 시장군이 전쟁의 와중에 이 지점에서 불력에 의한 종교적인 도움을 받았거나 혹은 알 수 없는 신이神異를 겪고 정사초당을 건립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상기한 것은 모두 가정일 뿐 확실한 것은 앞으로의 연구 성과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 비문의 찬자撰者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어 이 비가 순수한 우리나라의 비인지 아니면 중국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비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참고할 만한 점이 있는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황제와 관련된 용어 앞에는 공간을 두어 높임을 표시하였다는 점이다. 둘째, 당 태종을 중국쪽에서 호칭하는 태종문황太宗文皇(제)이라고 표현한 점도 참고가 된다. 셋째, 예맥이라는 용어가 백제나 신라뿐만 아니라 고구려 자신들도 사용하지 않는 중국식 표현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몇 가지를 참고로 비문의 찬자를 중국인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서체에 구양순체歐陽詢體 수용 이전에 신라에서 유행했던 북조北朝 해서의 서풍書風이 일부 남아있다는 점이나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태종무열왕릉비太宗武烈王陵碑(662년경)」,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682년경)」, 「김인문묘비金仁問墓碑(695년경)」 등과 같은 구양순체로 쓰여졌다는 점, 비슷한 시기에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중국계 금석문(「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 「정림사지 오층석탑 미석각자定林寺址 五層石塔 楣石刻字」,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과는 서체상으로 크게 차이가 있다는 점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따라서 비문은 중국적인 취향에 맞게 신라인이 지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신라인에 의해 지어진 것을 중국인이 일부 가감 수정했을 가능성도 있다. 비문 찬자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 더 많은 검토가 요구된다.

  
 

  서예사 측면에서도 본 비는 방정근엄方正謹嚴한 구양순체가 수용되었음을 입증하는 자료로서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구양순체로 쓰인 「태종무열왕릉비(662년경)」가 「태종무열왕릉비」라는 제액題額을 제외하면 단 두 자 밖에 없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판독 가능한 글자가 274여 자 정도나 되는 본 비의 중요성이 어느 정도인지 추측할 수 있다. 더불어 이 비는 7세기 후반의 전쟁 상황과 신라의 통일전쟁에 대한 새로운 각도를 제공하는 중요한 기록으로, 삼국통일을 전후한 7세기 한반도의 정세와 사회상을 알게 하는 귀중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



조병성(직지성보박물관 학예연구원)






1) 『삼국사기』 신라본기 5 태종무열왕 6년 4월·同書 백제본기 6 의자왕 19년 4월.
2) 『삼국사기』 41 열전 1 김유신 10월.
3) 동잠, 무산, 감물은 모두 지금의 김천시 개령면 일대에 위치한 지역이다(『大東地志』 5 慶尙道 下 金山·開寧).
4) 『신증동국여지승람』 29 경상도 금산군.
5) 장충식, 「김천 미륵암 시장군비의 조사」, 『한국고대사연구』 15, 1999, 140~141쪽.
    민덕식, 「당 시장군 정사초당비에 대한 검토」, 『백제문화』 31, 2002, 167~1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