含資道摠管柴將軍精舍草堂碑片(1)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7-07-19    조회 : 2935
들어가는 말

직지성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 가운데 함자도총관시장군정사도당비편含資道摠管柴將軍精舍草堂碑片(줄여서 ‘시장군비’라고 함)이 있다. 이 비는 경북 김천시 남면 월명리에 있
  
는 미륵암彌勒庵에서 발견된 것으로, 1997년 봄 미륵암 법당 안에 하반부가 매몰된 석불1)을 사찰 측에서 자의적으로 발굴하는 과정에서 출토되었다. 당시 출토된 비편은 모두 3편이었는데, 나머지 두 개의 비편은 서체와 글자의 간격 등에서 차이가 나는 별개의 비편으로 확인되었다. 비의 내용으로 보아 시장군이 정사초당을 건립한 7세기에 새겨진 것으로 여겨진다. 고대사의 문헌사료가 많지 않기 때문에 울진의 <신라 봉평비>, 창녕의 <진흥왕 순수비> 등 금석문 자료는 매우 중요한 사료가 될 수 있다. 이 비는 오래된 연혁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해 왔으며, 관련 논문도 한두 편에 불과하다. 또한 이 비석을 통해 7세기 당시 김천의 역사적 의미에 관해서도 고찰할 수 있다.


시장군비의 구성과 내용

  
  이 비는 화강암으로 되어 있는데, 비편의 크기는 길이 62cm, 폭 39cm 정도로 상부가 좌측에서 우측으로 치솟은 사다리꼴형으로 하단과 좌측의 일부 비면이 파손된 상태이다. 또한 비 뒷면이 편편하지 않고 부정형이이어서 어딘가에 비 뒷면을 파묻고 앞면만 나오게 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비문은 얇은 음각으로 새겨져 있지만 육안으로 판독이 가능하며, 탁본을 통해 좀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  현재는 비의 생김새를 살려 비면을 읽을 수 있도록 비스듬하게 전시해 놓고 있으며, 잘 보이지 않는 비면을 판독할 수 있도록 탁본을 함께 전시해 놓았다. 비면은  13~21자씩 15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행서체가 약간 섞인 해서체로 306자의 글자가 남아있으며 어느 정도 판독이 가능한 글자는 274여 자 정도이다. 글자의 크기는 세로 2.0cm, 가로 1.5cm 정도로 비의 우측 상부에서 아래쪽으로 11cm 정도의 지점부터 1행이 시작되고 있다. 또한 비의 우측 상부에는 ‘大(1.4x1.0cm)’자와 ‘㥎(2.0x1.7cm)’자로 추측되는 글자가 우측 상부에서 좌측으로 11cm 정도 지점에 새겨져 있다. 그러나 글씨의 격이 다른 글자보다는 떨어지는 것으로 보아, 후에 누군가가 새겨 넣은 것으로 보인다.

  

  비문의 주인공은 7세기 신라의 통일전쟁에 참여하여 백제와 고구려 정벌에서 활약한 당나라 장수 시철위柴哲威로 추정된다. 특히 이 비문을 통해 시철위가 660년의 소정방蘇定方이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이 되어 이끈 당나라 13만 백제원정군에 가림2)도행군총관加林道行軍摠管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661년 소정방이 평양도행군총관平壤道行軍摠管이 되어 본격화된 고구려 원정에 함자3)도행군총관含資道行軍摠管에 제수되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

  비를 세운 연대는 비문에 시철위가 가림도행군총관加林道行軍摠管으로 백제 침공에 참여하였고, 고구려 원정 시 함자도행군총관含資道行軍摠管에 제수되었다는 내용이 참고가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시철위가 참여한 백제 침공은 660년에 있었으며, 함자도행군총관에 제수된 고구려 원정은 661~663년 동안 이루어졌다. 더욱이 신라 사신이 용삭龍朔4)이라는 연호를 받아 왔다는 사실은 이 비가 세워진 시기가 661~663년의 어느 해였음을 분명하게 해준다. 특히『삼국사기』에 신라 문무왕 원년(661년) 6월 당나라에서 숙위宿衛하던 김인문金仁問 등이 고구려 원정에 상응하라는 당나라 고종의 칙명勅命을 가지고 귀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5) 그런데 이 기사가 비문의 ‘이달 11일에 신라 사신이 용삭이라는 연호를 받아 왔다’는 내용과 상통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 원정에 상응하라는 고종의 칙명과 함께 시철위에게도 함자도행군총관에 임명한다는 칙명이 전달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추정을 바탕으로 시철위가 함자도행군총관에 제수된 시기는 661년 6월 11일이며, 본 비가 세워진 시기는 661년 6월 11일 이후의 어느 날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 석조미륵불입상으로 고려시대 석불이다. 현재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402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불은 연화문 대좌 위에 갓처럼 생긴 석조石造의 둥근 보관을 쓰고 있으며, 대좌에서 보관까지의 총 높이는 약 280Cm(대좌 제외 : 약 240Cm) 정도이다.

2) 가림은 백제 웅천주의 가림군으로 수륙의 요충지였다고 한다.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일대를 가리킨다(『三國史記』 36 雜志 5 地理 新羅 熊州 加林郡·同書 37 잡지 6 백제 웅천주·『新增東國輿地勝覽』 17 忠淸道 林川郡).

3) 안정복은 ‘함자현의 대수帶水가 서쪽으로 대방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라는『漢書』 地理志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대수를 임진강, 대방帶方을 송경松京 풍덕豊德으로 비정하였다(『東史綱目』 附卷下 帶水考). 따라서 안정복의 견해에 비춰보면 함자는 지금의 황해도 개풍군 풍덕의 동쪽, 임진강 상류의 어느 한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4) 중국 당나라 고종高宗의 연호로 661~663년 동안 사용되었다.

5) 『삼국사기』 신라본기 6 문무왕 상 원년 6월. 본 비문의 8·9행에 ‘今月十一日有新羅使元龍朔’라는 내용이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기록과 비문의 내용을 참고하여 ‘今月十一日’은 661년 6월 11일로 추측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