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 산송문서 浮石寺 山訟文書
글쓴이 : 관리자     첨부파일 :       날짜 : 03-04-25    조회 : 5487
1980년대까지만 해도 산송山訟은 흔히 ‘풍수사상을 믿고 서로 좋은 산소자리를 차지하려고 벌인 싸움’, 다시 말해 풍수설에 근거하여 분묘를 중심으로 전개된 소송으로 국한하여 이해해 왔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산송에 대한 이해가 산지의 이용과 소유권을 둘러싼 산림 분쟁으로 확대되면서, 산송의 범주 또한 산지 소유주의 허락 없이 분묘를 쓰는 투장偸葬과 이를 금하려는 금장禁葬은 물론, 산지 소유주의 허락 없이 벌목하는 투작偸斫과 이를 금하려는 금작禁斫, 무단으로 농경을 일삼는 기경起耕, 경계 및 소유권의 대립 등 산지와 관련하여 발생하는 일체의 분쟁으로 확대하여 이해하고 있다.      
  산송은 노비송奴婢訟, 전답송田畓訟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사송詞訟, 곧 민사소송의 한 형태였다. 산송은 16, 17세기부터 차츰 나타나기 시작하여 특히 18〜19세기에는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어 크게 성행한 특징적인 역사현상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시대 민간에서 관부官府에 올린 소장訴狀‧청원서‧진정서를 통칭하는 소지所志의 대부분이 산송문서인 점만 보아도, 산송이 얼마나 흔한 분쟁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조선후기에 산송이 빈발하여 중요한 사회현상으로 부각되는 저변에는 유교 이념의 정착과 확산, 이와 결합한 풍수지리설의 유행, 양반층의 몰락과 이에 대비되는 중인‧상인층의 성장에 따른 신분제의 동요 등이 자리잡고 있다.  
  
  
산송이 중요한 사회 현안으로 부각, 확산되자 사회의 일부를 이루는 사찰 또한 그 소용돌이에 말려들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대부분의 사찰이 산지, 그것도 이른바 명당이라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 입지의 특성상, 사찰은 언제든지 산송의 당사자가 될 수 있는 소지를 안고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사찰 관련 문서 가운데 적지 않은 분량이 산송과 연관된 것임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다만 사찰이 산송의 분쟁 당사자일 경우 대부분은 피해자의 입장에 서는 특징을 보인다. 왜냐하면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하는 조선시대에 승려들은 신분이 가장 낮은 계층에 속했으며, 따라서 사찰의 지위 또한 법의 보호 밖에 있다고 할 만치 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찰과 관련한 산송은 흔히 지방의 양반이나 유생, 유력자가 사찰 소유의 산지에 투장을 하게 되면, 사찰에서는 이를 시정하기 위해 관부에 소지를 올려 민원을 제기하는 형식으로 나타나곤 하였다.
  최근의 한 연구에서 산송이 발생하는 사유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분산수호권墳山守護權의 침해를 둘러싼 분쟁, 즉 투장과 금장 시비로 말미암아 산송이 발생하는 경우가 70%에 육박하고, 그 다음으로 약 20%가 양산금양권養山禁養權의 침해를 둘러싼 분쟁, 즉 투작과 금작으로 생겨나며, 분산의 매매와 관련한 산송이 7% 남짓으로 그 뒤를 잇는다. 조선후기 산송의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양태는 분묘를 중심으로 전개된 분쟁이었으며, 특히 투장과 금장이 제일 주요한 분쟁 요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사찰 관련 산송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본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부석사 산송문서와 토지매매문기는 이런 주된 흐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는 자료이다. 19세기 말, 부석사의 산지를 두고 벌어진 산송이 투장에 따른 대응으로 제기된 경우가 아니라 산지 매매를 둘러싼 소송일뿐더러, 사찰이 피해자의 입장에서 원고로서 소송을 제기한 경우가 아니라 오히려 가해자의 위치에서 피고로서 소송을 당한, 특이하고 예외적인 산송 사례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물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문서들의 내용을 간략히 살펴봄으로써 좀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부석사 산송문서는 당시 소송의 한쪽 당사자였던 안동安東의 진사進士 김건영金建永 가문에서 부석사가 행정적으로 소속되어 있던 순흥부順興府에 올린 소지, 논란이 되는 산지의 상황을 그림으로 도해한 지도, 그리고 부석사에서 김건영의 집안으로 생각되는 김참판댁에 산지를 매도한 문서인 토지매매문기를 한 묶음으로 하고 있다. 물론 토지매매문기는 산송과 관련 없이 그것대로 독립적인 문건이기도 하지만, 소송 당사자인 김건영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빙자료로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면 산송문서의 일부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소지는 김건영을 비롯한 동일 가문의 7명이 연명으로 순흥부에 올린 것이다. 현재 소지는 하반부의 상당 부분이 결락되어 없어진 상태이다. 따라서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재 남아 있는 부분만으로 대강의 내용을 파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소지를 올리는 자신들은 지난 무진년(1868)에 부석사 극락암 뒤편 산자락에 조부모의 묘를 쓴 사람들이다. 당시에 부석사의 사세가 기울어 자신들이 250금金으로 7두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