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事成功錄』을 통해 본 남장사 괘불 (3)
글쓴이 : 관리자     첨부파일 :       날짜 : 02-04-01    조회 : 4874
 3. 남장사 불사와 참여 화사

 이 장에서는 남장사 괘불에 참여한 화사뿐만 아니라 『불사성공록』의 「연화질」에 기입된 화사집단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연화질」에 기입된 화사집단은 경성화공, 호남화공, 대승화공이다. 지금까지의 화사연구를 살펴보면, 호남지역에 활동한 화사들은 다른 지역화사에 비해 어느 정도 그 연구성과가 축적된 상태이다1). 이에 비해 경기도지역 화사는 19세기후반에 활동한 화사집단을 제외하고 18세기 화사에 관한 연구는 미진한 상태이다. 근래에 와서 경상도 지역의 화사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나, 이 역시 19세기의 화사에 집중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불사성공록』의 「연화질」은 18세기 후반 경기도 화사집단인 경성화공과 경상도 화사집단인 대승화공의 행적을 복원 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정조 12년, 남장사의 노비구인 성학이 돌아가시자 그의 제자들이 스승을 위해 유명회를 제작하였고, 이때 괘불도 조성되었다. 불사가 진행된 당시의 정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장인 70여 명을 모아 장면을 나누어 그리게 하였다. 호남의 쾌윤(快允)과 사불산(四佛山)의 홍안(洪眼)은 유명회를 그려내었으며 서울의 상겸(尙謙)은 영산회를 그렸는데, 4월 초파일 우리 부처님이 탄생하신 날 붓을 들어 (그 달) 28일에 붓을 놓았다2).

② 명부전을 세척하고 지장회 한 폭과 명부의 시왕 각 부를 아울러 그림으로 그렸다. 또 명부 시왕들의 상과 장군, 동자, 사자 상도 일시에 함께 빠진 것을 보충하고 중수하였다. 무신년 4월 초파일에 일을 시작하여 28일에 끝마치니…3)


 
  
『불사성공록』에 기록된 불사 규모이다. 괘불을 포함한 지장회, 시왕탱 조성 및 시왕상, 장군상, 동자상, 사자상을 보충하고 중수하기 위해 70여명의 장인을 모아 4월 초 8일에 일을 시작하여 28일날 마쳤다.

 이때 참석한 화사의 이름을 보면, 湖南良工 有眼, 快允, 潤甫, 泓原, 福粲, 平三, 智淳, 成閏, 裕契, 贊玉, 極贊, 攝蘭, 頓明, 察旻, 日訓, 典悟, 暢修, 敏普, 宇心, 處定, 永玉, 允贊, 九栢, 採政, 贊蓮 등 25명과 大乘良工 弘眼, 學禪, 定○, 漢暎, 尙活, 斗印, 法椽, 信謙, 普淳, 道成, 巨暎, 巨旭, 戒宇, 永守, 頓性, 大一, 錦淳, 汝仁 등 18명, 그리고 京城良工 敬還, 尙謙, 定淳, 瑞洪, 道淨, 德旻, 永輝, 性一, 弘旻, 德旻, 性允, 快全, 法成, 有弘, 處洽, 處洪, 處澄 등 17명으로 총 60명이 참여하였다. 호남지역에서 온 화사와 대승사의 화사는 지장탱과 시왕탱을 제작하고, 서울에서 온 화사들은 괘불을 담당하여 각각 일을 진행하였다. 남장사에는 이 불사 흔적으로 괘불을 비롯하여 유명회와 관련된 유물로 동자상 1점과 현왕탱 1점이 남아 있다. 남장사 괘불은 세로 1,070㎝×675㎝의 규모로 서울 화사 17명을 동원하여 20일 동안에 제작되었고4), 대승사 화사 錦淳[錦珣] 혼자 그린 100.5㎝×73.5㎝ 크기의 현왕탱(도 3) 역시 이 기간에 이루어졌다.

 괘불 제작에 참여한 경성화공 가운데 주목되는 이는 尙謙과 敬還이다. 상겸은 정조 10년(1786)에 상주 황령사 아미타후불탱과 신중탱을 제작하였으며, 정조 12년에는 남장사 괘불, 그리고 정조 14년(1790)에는 남장사 나한탱과 용주사 감로탱을 제작하였다5)

 그 동안 남겨진 작품을 가지고 상겸이 충청․경기도 또는 경상도의 화사로 보는 의견들이 있었다6). 『불사성공록』을 보면, 상겸은 경성화공으로 적고 있다.

 괘불 화사질 첫머리에 올라있는 (龍峰堂)敬還은 정조 6년(1780) 봉선사 대웅전 불상 개금 때 寬虛堂雪訓과 함께 金魚로 활동하였다. 이때 기록을 보면,
  
상겸은 이들보다 낮은 의미인 龍眼의 위치에 있었다. 경환의 다른 작품으로 정조 14년(1790) 설훈과 함께 제작한 현등사 신중탱이 있다(도 4). 

 이 신중탱의 존상 표현과 필선 및 채색 등을 상겸이 그린 황령사 아미타후불탱(도 5)과 신중탱에 비교해보면 화풍이 유사하다. 이처럼 설훈과 경환이 주도하는 불사에 상겸이 참여하였다는 점, 그들과 화풍이 유사한 점, 그리고 설훈의 화맥을 계승했다는 처증이 상겸과 함께 남장사 괘불․용주사 감로탱 제작에 참여했다는 점등을 생각하면 상겸은 서울지역 화승으로 설훈-경환의 화맥을 잇고 있다 하겠다7)

 대승화공은 사불산 대승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화사집단이다. 이들은 19세기 경상도 지역의 불화제작을 주도했으며 四佛山派라고도 불린다. 『불사성공록』에 올라 있는 대승화공은 모두 18명으로 이 때에도 단일 사찰의 독자적인 화사집단으로써 자리했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까지 대승화공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이는 弘眼과 信謙이다. 신겸은 19세기 전반에 김룡사, 혜국사, 용문사, 남장사 등 경북 북부 사찰에서 소위 신겸화풍으로 분류되는 많은 불화를 제작하였다. 이제까지 신겸의 초기작으로 알려진 월정사 관음변상묵탱(1790년), 법주사 신중탱(1795년), 직지사 신중탱(1797년) 등의 화기를 근거로 그가 偉傳의 화맥을 이었다는 의견과8), 19세기 초반 홍안과 함께 한 일련의 불사로 미루어 홍안과 영향관계가 있음을 추정하는 의견이 제시되었다9). 따라서 정조 12년에 있었던 남장사 불사에 신겸이 대승화공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비록 현재 남장사에 신겸이 그린 당시의 불화가 남아있지 않지만 그가 정조 12년 유명회 불사에서 대승화공의 멤버였고10), 이 집단을 이끌던 인물이 홍안이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신겸은 홍안의 화맥을 이어받았을 가능성이 더욱 높다. 또한 신겸의 초기작 가운데 그가 단독으로 그린 월정사 관음변상묵탱(도 6)과 위전과 공동작업한 직지사 신중탱(도 7)은 서로 다른 사람의 작품으로 보일 만큼 화풍이 다르다. 직지사 신중탱보다 오히려 월정사 관음변상묵탱이 19세기 전반에 그려진 신겸의 작품과 화풍적으로 연결된다.

 신겸의 화풍은 타원형의 둥근 얼굴․양 볼이 약간 볼록한 옆얼굴, 긴 코에 안으로 몰린 눈과 작은 입 등의 개성적인 인상에 세장한 신체 표현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화풍이 확립된 19세기 초반은 홍안의 활동시기 중 말년에 해당되며, 신겸은 그의 활동시기 중 절정기임으로 거의 신겸의 독자적인 화풍으로 정리할 수도 있다. 홍안이 그린 정조 5년(1781) 혜국사 신중탱과 순종 4년(1804) 혜국사 석가모니후불탱을 비교하면 그 변화가 확연히 드러난다. 혜국사 석가모니후불탱은 신겸과 함께 그린 것으로 홍안 말년에는 오히려 신겸의 화풍을 존중한 듯 하다.

 정조 12년에 있었던 남장사 불사는 신겸의 화풍 형성에 중요한 계기가 된 것으로 짐작된다. 1788년 이전에 그려진 신겸의 불화가 발견되지 않은 현재로서 근거 자료는 미비하지만, 신겸이 그린 19세기 전반기 불화와 경성화공이 그린 남장사 괘불을 비교해 볼 때 그 가능성은 높다 하겠다. 

 
  
실제 남장사 괘불과 신겸의 작품 중 가장 비슷한 화풍을 보이는 탱화는 순종 3년(1803)에 제작된 김룡사 대웅전 석가모니후불탱(도 8)과 응진전 석가모니후불탱이다(도 9)11). 대웅전 석가모니후불탱의 주존 모습과 광배에 있는 7구의 부처, 그리고 응진전 석가모니후불탱에서 연꽃을 든 주존은 남장사 괘불과의 도상적 연관성을 보여준다. 도상뿐만 아니라 신겸이 그린 19세기 전반의 불화에서 보이는 타원형 얼굴에 중앙으로 몰린 이목구비, 세장한 인체 표현 등은 이미 경환이나 상겸의 불화에서 간취되는 부분이다. 이 화풍은 신겸이 1788년 이후에 제작한 불화 즉, 정조 14년(1790)의 월정사 관음변상묵탱에서도 보이고 있어 신겸이 경성화공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남장사 괘불에 그려진 사천왕 가운데 검을 든 천왕과 용과 여의주를 쥔 천왕의 강한 인상 표현 및 역동적 자세는 신겸의 모든 불화에서 계속적으로 나타나는 천왕의 표현으로 이 또한 경성화공과 신겸의 관련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신겸의 독특한 화풍은 정조 12년 남장사 불사에 모인 화사집단 중 경성화공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으며, 오랜 작업을 통해 보다 정제된 얼굴표현과 안정된 자세, 眞彩의 사용 등으로 신겸 자신만의 화풍을 완성해 나갔다.


 마치는 글


 본 글은 『불사성공록』을 토대로 남장사 괘불의 조성배경, 괘불의 도상해석과 사상적 전거, 당시 불사에 참여한 화사들의 면모를 살펴보았다.

 남장사 괘불은 영산회 설법을 표현한 괘불이다. 주존은 연꽃을 든 석가모니불로, 이는 『묘법연화경』이란 교와 사자상승․교외별전이란 선이 결합된 도상이다. 『불사성공록』에서도 『묘법연화경』의 내용을 들어 남장사 괘불이 영산회를 표현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 내용을 근거하여 주존의 광배에 있는 부처들이 「견보탑품」에 등장하는 석가의 분신불임을 해석하였다. 또한 분신불 가운데 자리한 비로자나불은 영파당 성규의 글을 통해 법신과 화신이 하나의 불신임을 표현한 것임을 살펴보았다. 이에 덧붙여 영조 43년(1767)에 응암당 희유가 쓴 <通度寺 改成掛佛記>현판의 글을 통해 18세기 후반기, 당시 스님들의 생각했던 형상과 진리, 화신과 법신의 문제를 부족하지만 필자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불사성공록』이 미술사적으로 가지는 의미는 18세기 후반에 활동한 몇몇 화사의 행적을 밝힐 수 있는 자료라는 점이다. 충청․경기도 또는 경상도 화사로 분류되던 상겸이 서울 화사였으며, 그와 함께 활동한 설훈과 경환의 행적을 정리하여 18세기 후반 경기도에 활동했던 화사에 대해 알아보았다. 또한 19세기 전반 경북 북부의 불화제작을 주도했던 신겸의 화맥과 그의 독특한 화풍이 형성되게 된 계기를 남장사 불사와 연결하여 검토하였다. 그리하여 신겸은 대승사 화승으로 홍안의 화맥을 계승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의 화풍은 남장사 괘불 제작을 담당했던 경성화공의 화풍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이용윤(직지성보박물관 학예연구원)




1) 이은희, 「雲興寺와 畵師 義謙에 관한 考察」 문화재 28호, 문화재관리국, 1991 ; 안귀숙, 「朝鮮後期 佛畵僧의 系譜와 義謙比丘에 관한 硏究(상)․(하)」 미술사연구 8․9호, 1994․1996 ; 정성화, 朝鮮後期 雙磎寺 佛畵 硏究, 동국대석사학위 논문, 1996 ; 김정희, 「朝鮮後期 畵僧 硏究(Ⅰ)-錦巖堂 天如」 省谷論叢  제29, 성곡학술문화재연구소, 1998 ; 장희정, 「朝鮮後期 曺溪山 地域 佛畵의 硏究」 美術史學硏究 210, 한국미술사학회, 1996 등 참고 

2)召良工七十餘人 分會圖寫 湖南之快允 四佛之洪眼 寫出幽冥會 京之尙謙 繪素靈山會 四月八日 我佛降生之辰執筆 二十八日落筆 「南長寺掛佛新畵成記」
3)而地藏一會 十冥王各部 幷繪寫于素 又十冥王等相及將軍童子使者之像 一時用輔缺重修 戊申四月初八日始事 二十八日告功 「幽冥敎主地藏大聖新畵成腹藏願文」
4)다른 괘불과 제작 여건을 비교하면, 청곡사 괘불(1722년, 1,020×500)은 10명의 화사가 40여일 동안 작업을 하였으며 광덕사 괘불(1749년, 1,080×718)은 6인이 60여일만에 작업을 마쳤다. 10m의 괘불을 제작하는데 평균 11인은 40일, 22인은 20일 정도 소요된다. 이에 준하면 남장사 괘불도 보통 작업 속도로 괘불이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불사성공록의 기록처럼 남장사에서 70여명의 화공들을 모아 20일 동안 불사를 마쳤다라는 것은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현재 남장사에는 한꺼번에 10m의 괘불과 11점 이상의 유명회 불화가 그려질 만한 공간이나 불사에 참여한 70여명이 기거한 장소가 없다. 추정이긴 하지만 오히려 각 지역에서 제작되어 옮겨졌을 가능성이 높다.
5) 황령사 아미타후불탱 신중탱(尙謙, 唱謙, 性玧, 快全, 法成, 有弘), 용주사 감로탱(聖上之十四年庚戌九月日畵成甘露會 奉安于隋城花山龍珠寺 畵師 尙兼, 弘旻, 性玧, 宥弘, 法性, 斗定, 慶波, 處洽, 處澄, 軏軒, 勝允), 남장사 나한탱(尙謙, 戒寬, 宥弘, 法成, 宇悅)
6) 상겸을 경기, 충청도 화사로 보는 견해로는 안귀숙, 「朝鮮後期 佛畵僧의 系譜와 義謙比丘에 관한 硏究(상)」,『미술사연구』8호, 1994, pp. 68~69를 참고;경상도 화사로 분류한 견해로는 장희정,「朝鮮後期 佛畵의 畵師 硏究」, 동국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0, pp.102~104를 참고;이외에도 상겸을 영․정조 도화서 화원으로 보는 견해로는 예용해,『단청』, 문화재관리국, 1970, p.71을 참고.
7) 상겸이 色敏-守海의 화맥을 이었다는 의견은 안귀숙, 앞의 글 참고.
8) 안귀숙, 앞의 글, p.78을 참고.
9) 김경미, 「朝鮮後期 四佛山佛畵 畵派의 硏究」, 동국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0, pp.19~20와 심효섭,「朝鮮後期 畵僧 信謙 硏究」, 『蓮史洪潤植敎授停年退任紀念論叢 韓國文化의 傳統과 佛敎』, 논총간행위원회, 2000, pp. 564~581 참고.
10) 신겸은 그의 화맥만큼 출신 사찰도 불분명하다. 신겸의 진영이 김룡사에 모셔지고, 김룡사에 그가 그린 많은 탱화가 전해지며, 신겸이 그의 후원자였던 김룡사 낙파당 지수의 진영을 그린 점으로 보면 신겸이 김룡사 스님일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불사성공록의 기록대로 신겸이 대승화공, 즉 대승사 스님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9세기 후반 사불산파의 중심화사인 하은당 응상의 제일이 김룡사 화장암의 기일록에 기록된 것을 보면 신겸의 진영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김룡사에 모셔졌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대승사와 김룡사의 화사 문제는 지속적인 기록 발굴과 연구를 통해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11) 대웅전 석가모니후불탱(畵師 比丘弘眼 都畵 愼謙 有心 水衍 寬玉 普贊 性守 贊華 戒添 斗贊 如訓 定囍 定旻 達仁 體圓 達洪 智彦 道正), 응진전 석가모니후불탱(畵師 弘眼 愼謙 有心 都畵 水衍 寬玉 普贊 性守 贊華 如訓 定旻 達仁 達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