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事成功錄』을 통해 본 남장사 괘불 (1)
글쓴이 : 관리자     첨부파일 :       날짜 : 02-04-01    조회 : 3998
 들어가는 글
 

 南長寺는 경북 상주 露嶽山에 위치한 사찰로, 신라 흥덕왕 7년(832)에 眞鑑國師(774~851)가 長栢寺란 이름으로 개창하였다. 고려 명종 16년(1186)에 覺圓國師가 현 위치로 사찰을 옮기면서 지금의 남장사란 이름으로 寺名을 바꾸었다.1) 이후 남장사는 북장사, 갑장사, 서장사와 더불어 상주의 四長寺로 일컬어졌다.

 
  
남장사는 두 개의 예배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예배공간은 일주문과 금강문을 지나 만나는 극락보전이다.(도 1) 극락보전은 광해군 2년(1610년)에 건립되었으나 인조 13년(1635)에 소실되었다가, 영조 52년(1776)과 철종 7년(1858)에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두 번째 예배공간은 극락보전 뒤쪽, 불이문을 지나 마주치는 보광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광전의 건립연대는 알 수 없고 다만 고종 28년(1891)에 중수와 단청을 했다는 기록만이 전한다. 보광전 중심으로 좌우에는 옛 진영각이었던 요사와 嶠南講院 건물이 자리하고, 석축 위로 산신각과 근래에 새로 지은 진영각, 요사 등이 있다. 옛 진영각은 숙종 34년(1708)에 창건되었고 교남강원은 1800년경에 세워진 건물로 추정된다. 두 번째 예배공간은 사찰을 가로지르는 시냇물 건너편에 자리한 영산전으로 이어진다. 영산전은 광해군 13년(1621)에 창건하여 숙종 35년(1709)에 재건한 전각이다. 이처럼 남장사는 조선시대의 여러 불사를 통해 사찰 규모를 점차로 넓혀갔다.

 
  
사중에서는 조선시대의 불사를 기록한 典籍인 『南長寺金堂檀緣錄』(1473년), 『佛事成功錄』(1788년), 『有功錄』(1804년), 『本寺佛前有功錄』 등이 전한다. 이 가운데 『불사성공록』은 전각의 창건이나 중수를 기록한 다른 자료와 다르게 정조 12년(1788)에 조성된 불화를 서술하고 있다. 『불사성공록』에는 「南長寺掛佛新畵成記」, 「掛佛腹藏願文」, 「幽冥敎主地藏大聖新畵成腹藏願文」, 「佛事錢穀雜物等入記」, 「緣化秩」 등이 실려 있다. 이 중 「남장사괘불신화성기」와 「괘불복장원문」은 현재 남장사에 전하는 괘불에 관한 글이다. 본 글은 이 『佛事成功錄』(도 2)을 기본 자료로 삼아 남장사 괘불의 조성 배경, 괘불의 도상과 사상적 근거, 불사에 참여한 화사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남장사 괘불의 조성 배경




 극락보전 계단 왼쪽에는 괘불을 걸 때 사용했던 괘불대가 남아 있다. 그리고 극락보전 안에는 2개의 괘불 함이 전한다. 하나의 함에는 정조 12년(1788)에 조성한 괘불이 있고, 다른 함에는 펼치기도 힘들 정도로 화면이 심하게 손상된 괘불이 들어 있다. 조사기록에 따르면, 후자의 괘불은 영조 52년(1776)에 조성된 것이다.2) 이처럼 한 사찰에 2점의 괘불이 남아있는 예는 남장사를 포함해 부석사, 칠장사, 통도사 등이 학계에 보고 됐을 뿐이다.3) 2점의 괘불이 조성된 경우는 오히려 문헌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영조 40년(1764) 대둔사에서 동시에 조성된 삼존장육괘불과 아미타괘불을 들 수 있다.4)

 
  
『불사성공록』의 「남장사괘불신화성기」를 보면5), 정조 12년에 괘불을 새로 조성하기 전에도 이미 남장사에는 몇 차례 괘불을 조성했던 것으로 적고 있다. 바로 이전의 괘불은 10 여 년 동안 절에서 사용하다가, 작년에 성안으로 옮겨6) 기우제를 지내던 도중 비를 맞아 화면이 훼손되었다고 한다.7) 기록에서 이야기하는 괘불은 바로 영조 41년(1776)에 조성된 괘불이다(도 3).

 새로 괘불을 제작하게 된 이유는 사중의 노비구인 省學이 돌아가시자 그의 제자인 摠活, 戒軒, 漢柱, 聖益 등이 스승의 천도를 위해 幽冥會 관련 불사를 일으켰고, 이때 사중의 의견이 모여 괘불을 조성하였다고 한다.8) 유명회 관련 불사로 지장탱과 시왕탱이 조성되고 시왕상․장군상․동자상․사자상 등이 중수되었다. 당시에 조성된 유명회 관련 불화로 現王幀 1점만이 보광전에 전할 뿐이다9).

 괘불과 현왕탱의 화기를 살펴보면, 가선(대부) 성학이 시주질 첫머리에 올라 있어 이 스님이 정조 12년 불사의 원동력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성학의 입적을 계기로 이 불사가 일어났는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검토가 필요하다. 현왕탱 화기를 보면, 현왕탱이 괘불을 조성하면서 그려진다고 기록하였다10).

 그리고 성학의 천도와 관련된 불사임에도 괘불 화기나 현왕탱 화기 어디에도 스님 이름 다음에 ‘靈駕'를 적고 있지 않다. 이외에도 괘불 복장과 동경을 보관하기 위해 정조 7년(1783)에 만들어진 복장함 명문을 보면 '乾隆四十八年癸卯 月日造成 省學 振樞'라고 되어있다. 두 스님은 정조 12년에 이루어진 괘불 조성 불사에서 성학은 大施主로, 진추는 都監으로 참여하였다.

 이로 보아 정조 12년의 남장사 불사는 성학이 입적하기 전에 계획되었고 그의 유훈에 따라 제자들이 마무리 한 것으로 생각된다. 『불사성공록』의 기록처럼 스님이 돌아가심을 계기로 괘불이 조성됐다기보다 그 이전부터 다른 불사와 함께 진행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 권상로, 韓國寺刹全書,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p.329
2) 이 괘불은 1990년 직지사에서 실시한 남장사 조사 때에도 사진 촬영이나 정확한 기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약식 조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1776년에 조성된 영산회괘불이며 크기는 세로 1,007㎝×세로 588㎝이다.(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 직지사-말사편, 불지사, 1994, p.118) 상주시 자료에는 乾隆41年 丙申 5月 20日이란 조성연대가 밝혀져 있다(尙州市․郡, 尙州誌, 1989년, p. 803).
3) 칠장사와 남장사에 괘불이 2점씩 전해지는 상황은 각기 다르다. 남장사의 영조 41년(1776)과 정조 12년(1788) 괘불은 앞의 괘불이 훼손되어 새로 괘불을 조성하면서 영조 41년 괘불을 태우거나 매장하지 않은 예이다. 칠장사 괘불은 오불회괘불(1628년)과 영산회괘불(1710년)로 제작시기에 서로 82년의 차이가 있지만 두 폭 모두 화면 상태는 양호하다. 서로 다른 도상으로 그려진 점을 보면 훼손 여부를 떠나 사중의 사상적 기반의 변화로 새로 괘불이 조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4) …敬請良工畵成 靈山幀一軸 三尊丈六掛佛幀一軸 阿彌陀佛掛佛幀 三十三祖師幀各軸 梵天帝釋大幀各一軸 天龍幀幾軸 十王各幀 以圓滿之日敬設點眼法會… 蓮潭有一, 「點眼疏 大屯寺甲申春」 蓮潭大師林下錄 卷之三 疏(韓國佛敎全書 第10冊, pp.254~255.)
5) 『불사성공록』의 전문 해석은 직지사 강주이신 의룡스님과 박물관장인 흥선스님의 도움을 받았다.
6) 괘불을 사찰 아닌 다른 장소에 옮겨 봉안하는 기록은 여러 문헌에서 보인다. 직지사 사적기(1776년)에는 사중의 보관 문서 중 괘불이 읍내로 이운되는 것을 혁파하는 문서의 이름이 올라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사찰뿐만 아니라 마을 공동의례를 위해 괘불이 사찰 밖으로 빈번히 옮겨졌다. 
7) 前掛佛畵來者 不過十餘載 而逢久旱 入城呼雨諸天 忘垂寶盖之 全身蒙雨 彩像脫漏 主伴不具三十二相 人天所仰 固未存敬之紏 一寺老少 咸生悽愴者年矣
8) 有老比丘省學 早寄於斯 老歸於斯 非徒植宿緣於斯 執綱布德 不是凡流 況捨世後 其弟子摠活․戒軒․漢柱․聖益等 修收拾夢宅之餘塵 裹其師冥路之資粮 傾出千金 敬遵幽冥會塑畵之則 是時 寺論歸一  又建掛佛之大事 召良工七十餘人 分會圖寫 湖南之快允 四佛之洪眼 寫出幽冥會 京之尙謙 繪素靈山會 四月八日 我佛降生之辰執筆 二十八日落筆 高掛半空 金容煥目 晃然如多寶塔中 與人天百萬衆 說聽妙法之鴻儀也
9) 현재 직지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10) 南長寺現王幀掛佛畵成時因成安于上法堂 施主秩 嘉善省學漢柱 緣化主 證師南岳暎悟 誦呪快淳 雪寬 持殿 智演 管覯 良工 錦眴 辨供采花 都監振樞 別座元燁 化主義澄 和尙普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