題村舍壁 시골집 - 김정희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9-11-16    조회 : 3276
  

      題村舍壁                                시골집

               金正喜                                                   김정희

         禿柳一株屋數椽                             잎 진 버들 한 그루 서까래 몇 줄 집 한 채

         翁婆白髮兩蕭然                             허연 백발 할비 할미 둘이 모두 말 잃은 모습

         未過三尺溪邊路                             석 자 시내 곁 길 넘어 보지 않은 채

         玉蜀西風七十年                             옥수수로 가을바람 칠십 년을 살았다네

길 한 켠 옥수수밭 가운데 시골집 한 채, 그 안에서 두 늙은 할비 할미가 제 나름대로 살고 있었다. 나이를 물었다.

“몇이시오?”

“일흔입지요.”

“서울에는 가 보았소?”

“관가에도 가본 적이 없답니다.”

“무얼 먹고 사시오?”

“옥수수요.”

내가 부평초처럼 남북으로 떠다니며 비바람에 흔들리다가 이 노친네를 보고 그 말을 듣고서는 자신도 모르게 망연자실, 아득해졌다.

路旁村屋在蜀黍中, 兩翁婆熙熙自得. 問翁年幾何. 七十. 上京否. 未曾入官. 何食. 食蜀黍. 予於南北萍蓬 風雨飄搖, 見翁聞翁語, 不覺窅然自失.

25일째 시코쿠四國에서 나그네로 떠돌고 있습니다. 어제 오늘은 에히메현愛媛縣의 고원지대 구마고껜죠久万高原町의 산길과 들길을 걷고 있습니다. 고원이라고는 하나 산 있고 물 있고 그 사이에 논도 있고 밭도 있고 마을도 있어 우리네 산간마을과 별반 다름이 없습니다.

어제 달랑 집 한 채만 있는 고개 아래에서 배낭을 내려 놓고 흐르는 땀을 들이며 지친 걸음을 달랜 적이 있습니다. 오후의 햇살이 참 고즈넉했습니다. 오늘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그 집 앞 잔디가 촘촘히 자란 외줄기 산길을 다시 지납니다. 무슨 까닭인지 이 풍경이 눈에 밟혀 배낭을 맨 채 지팡이를 턱에 괴고 한참을 바라봅니다. 하늘은 아직 말간 반달을 채 지우지 않고 있습니다. 시든 가을 풀에, 아직 시들지 않은 푸른 풀에 무수히 맺힌 이슬방울들이 아침햇살을 담뿍 받고 있습니다. 시렁에 얹힌 오이넝쿨, 지붕을 덮은 호박 덩굴은 이미 마른 줄기가 되어 성한 잎은 몇 잎 남지도 않았습니다. 고추밭도 시든 대궁들만 들어서 있습니다. 밭 사이에 선 밤나무ㆍ참나무도 제 풀에 누른 잎을 하나 둘 떨구고 있습니다. 몇 고랑씩 무와 얼갈이 배추를 갈라 심은 자리만이 푸르고 싱싱합니다. 주위를 울창하게 에워싼 삼나무숲만 아니라면 그대로 우리의 산골과 하등 다를게 없습니다.

저리 무우ㆍ배추가 예쁜 걸 보면 분명 누군가 있으련만 녹슨 한석지붕 안에도, 숲 속에도, 밭 언저리에도 인기척이라곤 없습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습니다. 소리라곤 오로지 물소리, 몸을 가볍게 꿈틀대며 밭뙈기 사이를 지나는 작은 시내에서 흘러나오는 졸졸거림 뿐입니다. 누굴까, 여기 사는 사람은? 이 사람에게 법은 무슨 소용이며 나라는 또 어디에 쓴담, 하는 생각이 외진 산골에 무심히 내리고 있는 가을 햇살을 흔들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