晩自白雲溪後至西岡少臥松陰下作 소나무 아래서 - 이서구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9-06-17    조회 : 4134
  

晩自白雲溪後至西岡少臥松陰下作       소나무 아래서

                         李書九                                             이서구

                             讀書松根下                                 소나무 둥치 아래 글 읽노라니  

                             卷中松子落                                 책갈피에 떨어지는 솔방울 하나

                             支笻欲歸去                                 지팡이 앞세우고 돌아가는 길에는

                             半嶺雲氣白                                 고갯마루 절반이 눈인 듯 하얀 구름

  

지난 주말 예닐곱 벗들과 변산반도 일대를 돌아보는 답사길에 잠시 김영석 시인의 집에 들렀습니다.

두어 해 전, 십년 귀향의 꿈을 이룬 시인의 집은 三代가 積善해야 살 수 있다는 남향받이였습니다. 우뚝 멈춰선 바위 봉우리가 뒤를 받치고, 바다를 향해 잦아드는 산줄기가 왼편 오른편에서 보듬어 안고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마을 지나 저 멀리 곰소 앞바다 건너다보이고, 다시 그 너머로는 푸른 이내에 젖은 산그림자가 아득했습니다. 고개 하나 넘으면 來蘇寺라는, 그래서 바람결에 종소리가 들린다는 시인의 집은 솔숲이 장했습니다. 뒷산 자락, 좌우의 산줄기가 온통 솔숲이었습니다. 줄기 붉은 소나무들이 열 길 스무 길 늘씬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알맞게 간벌만 해준다면 이제 저 늠름한 소나무들에 남은 건 줄기의 붉은빛이 한층 깊어지는 것, 너울 같은 잎새를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를 씻는 것뿐으로 보였습니다.

시인은 좋아 보였습니다. 과천의 마당극제에서, 시인과 절친한 소설가 이윤기 선생 댁에서, 또 도회의 이런 저런 자리에서 만날 때보다 한결 나아 보였습니다. 술을 좋아하는 시인은, 여기서 마시는 소주는 돌아서면 술이 깨고 자고 나면 개운하다고, 혼자 마시는 술맛이 그만이라고 은근한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손주 손잡고 함께 걸을 솔숲길이 있음을, 그 손주에게 보여줄 작은 시내가 솔숲길과 나란히 흐르고 있음을 고마워했습니다. 여름에 올 손주에게 피라미를 낚을 작은 낚싯대를 만들어 주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농사일이 서툴러 힘이 든다며 진작에, 십년쯤 전에 낙향하지 못한 것을 서운해 했습니다. 이사를 왔다고, 새 집을 짓는다고 ‘축 발전’이라 쓴 봉투에 2만원, 3만원을 담아 오는 동네 인심 칭찬도 잊지 않았습니다. 남도임에도 눈이 푸지게 내리는 고장이라 雪壓松―눈에 눌린 소나무를 싫도록 볼 수 있다고 시인은 자랑했습니다.

시인의 아내가 손수 만든 쑥개떡과 오디즙을 앞에 놓고 밝은 햇살, 맑은 바람 아래 쉬엄쉬엄 이어지던 시인과의 대화는 긴 여름날의 햇발이 어지간히 기울어서야 뒤를 보였습니다. 아무 때나 쳐들어오겠다는 협박을 남기고 일어서는 손에, 아직 자리가 잡히지 않아 건넬 게 없다며 시인은 시집 한 권을 들려주었습니다.《모든 돌은 한때 새였다》. 그 시집 속에 담긴 시 한 수.

  흰 눈(雪)도 깨끗이 씻어

  마른 뼈로 좌정(坐定)하니

  아슬히 허공 건너는

  한 올 시린 물소리

                    김영석, <좌정>

洗雪軒―흰 눈 씻는 집, 이것이 문패 대신 걸린 시인의 집 扁額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