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中雜詩 산중 - 오균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9-03-18    조회 : 4514
  

      山中雜詩                                   산중

           吳均(梁)                                                  오균(량)

            山際見來煙                                             산 가으로 흩어지는 연기를 좇고

            竹中窺落日                                             대숲 새로 떨어지는 낙조를 줍네

            鳥向簷上飛                                             새들은 처마 위로 날아오르고

            雲從窓裏出                                             구름은 창 아래서 피어오르지

            (三首 中 第一首)



저녁 공양을 마치고 잔잔한 바람이 좋아 산길을 올랐습니다. 쉬엄쉬엄 걸어서 모자 쓴 이마에 땀이 슬몃 배일 즈음 암자에 닿았습니다. 대문은 늘 그렇듯 조용히 닫혀 있었습니다. 이곳에 올라 적막에 잠긴 문을 볼 때마다 “고요함 사랑하여 산에 살기에山居惟愛靜/한낮에도 사립문 닫아둔다오白日掩柴門/사귐이 적다고 남들은 싫다지만寡合人多忌/구하는 바 없으니 도는 절로 높아지리無求道自尊”하던 시구詩句가 떠오릅니다. 

대문의 문미門楣에는 전에 보지 못하던 편액 하나가 새로 걸려 있었습니다. 자란 모습대로 휘어진 느티나무 판자에 은, 선, 암, 세 글자를 한글로 새겼습니다. ‘흐음, 맵시를 지긋이 다스린 수굿한 글씨에, 더구나 한글 편액이라……’, 첫소리보다 끝소리를 조금씩 크게 쓴 글씨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속으로 가늠하는 사이 문이 열립니다. 

“편액을 거셨네요?”

“어떠요, 글씨?”

“참하네요, 새김도 괜찮고. 도장 한 점 찍지 않아 깔끔해서 좋네요.”

“그리 밉상 아니면 된 거지 뭐.”

이렇게 홀로 암자를 지키는 스님과 주고받으며 대문 안으로 들어섭니다.

“물은 안 모자랍니까, 많이 가문데?”

“아무렴, 남지는 않아도 부족이야 하것소. 아마 이 산중에서 내가 기중 나은 물 마실거요.”

불현듯 겨울 가뭄이 심했는데 이 높은 암자에 물은 넉넉할까, 싶어 물었더니 돌아온 답이 이랬습니다.

“헌데 어쩐 일로? 다 저문 해거름에……”

“아, 봄바람이 이렇게 사람을 불러내내요. 여쭐 말씀도 있고.”

옛 책을 뒤적이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대목들이 몇 군데 있어, 이럴 때야 하나라도 더 보고 들은 분이 낫지 않을까 하여 봄바람을 핑계로 겸사겸사 올라온 길이었습니다. 마루에 오르며 물 한 잔을 청했습니다. 숟가락을 놓자마자 은근히 가파른 길을 오른 탓인지, 아니면 주인 말마따나 산중에서 기중 나은 때문인지 물은 참 달고 시원했습니다.

“글을 보다 모르는 게 있어서요. 혹시 ‘소대연령疏臺連齡’이라고 들어보셨어요?”

“글쎄……”

“그럼 ‘유나상維那床’은 뭡니까?”

“모르겠는걸……”

“‘사오로四五路’는요? 삼장탱三藏幀이니, 제석탱帝釋幀이니 하는 탱화들과 나란히 열거한 걸 보면 무슨 불화의 하나가 아닌가 싶은데……”

“허, 갈수록 산이로구만. 짐작도 안 가는구만.”

“왜 化主 명단에 이름을 직접 밝히지 않고 甲申․乙酉․丙戌․丁亥生이라고 쓴 걸까요? 또 한 군데는 庚辰․辛巳․壬午․癸未生이라고 쓰여 있던데요.”

“아, 아무개가 모르는 걸 낸들 별 수 있남. 더 물어봐야 나올 게 없을 테니 우리 산신각이나 보고 가소. 터 좀 본다는 사람들마다 묘하다고 탐을 내거든.”

이 얘기 저 얘기 다문다문 이어지던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암자의 주인이 앞장을 섰습니다. 법당 왼편으로 한 걸음 물러난 곳에 한 칸짜리 작은 전각이 다소곳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자리는 묘해서 열두어 걸음 앞쪽에서 산줄기가 우뚝 서버리는 자리에 선 산신각은 마치 말안장 위에 올라앉은 듯했습니다. 근자에 그렸다는 탱화까지 한 바퀴 돌아본 뒤에야 발길을 돌렸습니다.

차츰 어둠이 내리는 뒤란을 되짚어 내려오다 무언가 희미하게 밝은 기운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습니다. 매화였습니다. 암자와 함께 해를 더해가며 이제는 둥치가 제법 실팍해진 매화나무가 바야흐로 개화를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나무도 주인을 알아보나, 내 방에는 아직 기척도 없는데 여기는 벌써 꽃을 피우네요.”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하긴 했습니다. 큰절보다 암자가 한참 높은 곳에 있건만 못해도 사나흘, 아니면 대엿새쯤 일찍 꽃을 피운 셈이니까요.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법당 앞 큼직한 돌무더기 가장자리로는 가는 수선화 잎줄기가 땅이 좁도록 촘촘하게 솟아올라 있었습니다.

“이 많은 꽃대가 다 꽃을 피웁니까?”        

“너무 배게 자라는 걸, 일간 좀 옮겨 가소.”

하나 둘 불빛이 돋는, 저 아래 먼 발치에 펼쳐진 도시로 눈길을 주며 무심히 던진 말을 이렇게 받으며 주인이 발걸음을 맞추었습니다. 나란한 발길은 대문을 지나 한 구비 모퉁이를 도는 곳까지 이어지다 멈추었지만, 두런두런 이야기는 걸음이 멎은 자리에서도 건너편 비구니 스님들이 사는 암자의 불빛을 바라보며 어두우니 들어가시라, 살펴가라는 말을 서로에게 건넬 때까지 한참을 더 이어졌습니다.

암자를 내려오는 두 손에 밀감 두 알―손아귀에 안기는 씨알 작은 한라봉 두 개가 들려 있었습니다. 일부러 내오신 걸 배부르다 사양할 수 없어 들고 나선 것이었습니다. 매끈하지 않아 오히려 탄력적인 그 감각을 따라 보일 듯 말 듯 하던 옛 얼굴처럼 짤막한 일화 한 토막이 떠올랐습니다.

  대옹戴顒이 봄날 밀감 두 개와 술 한 말을 가지고 길을 나섰다. 어디를 가느냐고 누가 물었다. 대옹이 대답했다. “꾀꼬리 소리를 들으러 가오. 이 소리는 속된 귀에 침을 놓아 시상을 고취시키는데, 그대는 아오?”

  戴顒春携雙柑斗酒. 人問何之. 曰往聽黃鸝聲, 此俗耳鍼砭 詩腸鼓吹, 汝知之乎?

                                                                           馮贄, 『雲仙雜記』卷二

‘쌍감두주雙柑斗酒 왕청황리往聽黃鸝’라는 유명한 고사를 낳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마음만 먹으면 밀감 두 개 들고 꾀꼬리 소리 찾아 나설 수 있는 시절이 눈앞에 있습니다. 내일이나 모레쯤, 저는 우선 수선화 몇 뿌리 얻으러 다시 한번 은선암隱仙庵―‘신선이 숨어사는 암자’에 오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