失題 가을소리 듣는 나무 - 김정희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8-10-16    조회 : 4982
  

          失題                           가을소리 듣는 나무

              金正喜                                                 김정희

          一院秋苔不掃除                             가을 이끼 쓸지 않아 온 뜰에 가득하고

          風前紅葉漸飄疎                             바람이 불 때마다 붉은 잎 성글어만 가는데

          虛堂盡日無人過                             빈 집에 종일토록 찾는 이 하나 없어

          老樹低頭聽讀書                             늙은 나무 고개 숙여 글 읽는 소리 듣고 있네
 

가을 기운이 완연해진 뒤 쉬엄쉬엄 풀을 뽑고 비질을 하여 앞뒤의 마당을 말끔히 정리했습니다. 그늘지고 습기가 많은 뒤뜰은 어느덧 이끼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해마다 조금씩 번지더니 이제는 얼추 뒷마당의 절반을 점유하였습니다. 사이사이 웃자란 다른 풀들을 뽑아주었더니 그대로 초록빛 융단입니다. 눈을 시원하게 해주고 마음을 촉촉하게 눅여줍니다. ‘지의地衣’라고 하더니, 땅이 얇은 옷을 한 겹 입은 듯하여 여간 보기 좋은 게 아닙니다.

정리된 마당 위로 갈잎이 지고, 마른 나뭇가지가 떨어지고, 도토리가 수도 없이 듣습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여러 날에 한 차례씩 이들을 쓸어 모아 태웠습니다. 올해는 이 ‘성가신’ 일을 어떻게 하면 좀 수월히 넘길까 궁리하다가 매일 잠깐씩 짬을 내어 줍고 있습니다. 꿀밤은 꿀밤대로 주워서 말리고, 마른 가지와 잎은 또 그들대로 모아서 쌓일 만큼 쌓이면 태우곤 합니다.

도토리 줍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절반쯤은 벌레 먹고 상하여 낙엽과 함께 태워야 하지만 나머지만으로도 날마다 실하게 한 됫박은 채울 수 있습니다. 어디에, 어떻게 쓰겠단 마련도 없건만 틈나는 대로 줍는 그 자체가 가외의 소득 같아 흐뭇합니다. 손 한번 보탠 바 없이 저절로 떨어지는 도토리를 줍는 것도 이럴진대 애지중지 심고 가꾼 작물을 거두는 마음이야 오죽할까, 하는 생각이 매번 듭니다. 낙엽 태우는 맛도 은근합니다.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이면 활엽수 잎들은 화르륵 타오르고 말지만, 그 사이에 불이 붙은 나뭇가지, 도토리 깎지, 상한 도토리 따위는 뭉깃하게 타오르며 알싸한 연기를 피워 올립니다. 물에 잉크가 풀리듯 허공으로 부드럽게 흩어지는 연기를 바라보는 것도 좋고, 옷에 살짝 배일 만큼 알큰한 그 냄새도 결코 싫지 않습니다. 

그 동안 주운 꿀밤이 어제는 임자를 만났습니다. 법회에 오신 노보살님이 허리를 숙이고 꿀밤나무 아래를 서성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짐짓 모른 체 하며 물었습니다.

  “주워서 어디에 쓰시게요?”

  “묵 쑤지요, 도토리묵.”

  “묵 쑬 줄 아세요?”

  “아다마다요, 나이가 얼만데…….”

법회가 끝난 뒤 두 분을 모시고 와 그 동안 모아 두었던 것을 종이 봉지 네 개에 나누어 담아드렸더니 반색을 하십니다. 이제 쓸 곳이 생겼으니 꿀밤 줍는 재미가 한결 더할 것 같습니다. 덕분에 늙은 나무들은 귀 기울여 글 읽는 소리 들을 인연이 더욱 멀어지겠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