麥田 보리밭 - 양만리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8-03-17    조회 : 5665
  

          麥田                                 보리밭

           楊萬里(宋)                                           양만리(송)

          無邊綠錦織雲機                                 가없는 푸른 비단 구름베틀 솜씨런가

          全幅靑羅作地衣                                 한 폭 그대로가 대지의 옷 되었구나

          此是農家眞富貴                                 이야말로 농가의 참된 부귀 아니리

          雪花銷盡麥苗肥                                 눈꽃이 모두 녹자 보리싹이 살지누나



모 옥션에서 보낸 경매 도록을 들추다 오월의 보리밭을 그린 그림에 눈길이 멎었습니다. 앞쪽의 개망초 몇 포기와 달개비꽃 두 송이, 그리고 낮게 솟은 먼 산을 제외하곤 온통 푸른 보리 이삭이 출렁이는 그림이었습니다. 화가는 작가노트에서 이렇게 적고 있었습니다. “오월 초록빛 보리밭에선 조상들의 슬픈 혼백이 떠도는 것일까, 이런 정서를 그리고 싶어서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수많은 보리수염과 알들을 끊임없이 그렸던 것 같다.”

그림을 보면서 제가 떠올린 건 꽃다운 처자의 머릿결보다 부드럽게 일렁이는 오월의 푸른 보리밭이 아니라, 황토 고랑 사이로 보리싹이 싱싱하게 줄지어 자라는 붉은 보리밭, 해토머리의 남도 보리밭이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꼭 서른한 해 전에 보았던 풍경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겨울 안거를 마친 발길이 야트막한 언덕 하나를 넘을 때 눈에 가득 들어오던 강진만 구강포의 바다 빛깔과, 하얀 고무신을 붙들고 좀체로 놓아주지 않던 찰진 황톳길 가녘으로 붉은 황토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며 수없이 푸른 줄을 긋고 있던 보리밭의 풍광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은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지난주에는 金魚 石鼎스님을 뵈러 부산엘 다녀왔습니다. 畵僧다운 화승으로는 이제 스님이 유일하지 싶습니다. 여든이 넘은 스님은 둥근 안경 너머 두 눈이 우물처럼 맑아 보였고, 畵筆 또한 여전히 굳건하셨습니다. 스님의 작업실-금정산 자락의 善住山房 뜨락에는 하마 매화 꽃잎이 분분히 날리고 있었습니다. 묵은 등걸에서 점점이 꽃을 틔우는 매화의 자태에 스님의 모습이 저절로 겹쳐 보였습니다.

이미 남녘에는 봄이 한창인지 꽃 얘기들로 수런거립니다. 돌아오는 길에 운전하며 듣던 방송으로는 주말이면 섬진강가 매화들이 절정을 이루리라 했습니다. 올해는 철이 일러 벚꽃도 4~5일쯤 일찍 피리라는 얘기도 들렸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꽃 얘기로 인사를 나누기도 합니다. 남녘보다는 한참 늦어 이곳 황악산 자락에서는 매화를 보려면 한 주일쯤 더 기다려야 할 듯합니다만, 어제 암자로 오르다보니 양지바른 곳에는 생강나무가 희미하게 노란 꽃을 틔우고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봄이 시작되고 있으니 만발하는 꽃소식에 꽃 얘기가 당연하지 싶습니다.

그래도 어디 봄이 꽃으로만 오던가요? 여인들의 가벼워진 옷차림으로도 봄은 오고, 풀리는 강물로도 봄은 오고, 맵지 않은 바람으로도 봄은 오고, 쟁깃날에 일어서는 흙덩이로도 봄은 오지 않던가요? 눈밭을 이기고 자란 푸른 보리 새순으로도 봄은 정녕 다가오지 않던지요? 푸르른 목마름으로 봄은 오고, 푸르른 목마름이 봄을 오게 하는 것은 또 아닐는지요? 그래서 모두들 꽃 얘기에 여념 없을 때, 저 혼자 엉뚱하게 붉은 황토 이랑에 보리가 푸르게 줄지어 자라는 남도의 보리밭을 떠올리는 것은 아니리라 짐작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