對竹 대나무를 마주하고 - 이행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8-01-03    조회 : 5272
  

          對竹                            대나무를 마주하고

               李荇                                                      이행

          十年功力一園林                                    정원 하나 두고서 십년 공력 쏟았으니

          誰識衰翁着意深                                    뉘 있어 이 늙은이 깊은 속내 알리요? 

          白首更無知己在                                    머리가 희어지도록 知己 하나 없으니

          此君相對要開襟                                    그대를 마주하여 흉금을 털어놓으리



얼마 전에 소포 한 꾸러미를 받았습니다. 책이 두 권 들어있었습니다. 강우방 선생이 쓰신《한국미술의 탄생》과 《어느 미술사가의 편지》. 안 그래도 출판기념회에 꼭 참석해야지 벼르다가 일정이 겹치는 바람에 축하 말씀 한마디 전하지 못했는데, 손수 서명까지 해서 보내주셨으니 송구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이른바 ‘靈氣文’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영기문의 원리로 한국미술사는 물론 세계미술사를 재구성하려는 큰 꿈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선생의 제안은 학계에서조차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반론 또한 만만찮은 실정이니 저로서는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할 입장이 전혀 아닙니다. 다만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제 비로소 대상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당신의 고백이,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소년 같은 열정과 자신감이 참 부러웠습니다. 자신을 생각하니 초라하고 부끄러웠습니다.

크리스마스에는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황재형 화백의 <쥘 흙과 뉠 땅>전. 신문기사를 통해 진작 소식을 접하고도 차일피일 하고 있었는데, 사모님이 전화를 하셨습니다. 얼마나 반갑던지요! 그러고도 또 여러 날이 지나서야 짬을 낼 수 있었습니다. 

십사오년을 기다렸으니 참 오랫동안 고대하던 전시였습니다. 90년대 초반 강원도 정선의 淨岩寺에 살던 무렵, 길이 뚫린 고개치고는 해발고도가 가장 높다는 싸릿재를 넘나들며 이따금 태백의 황 선생 화실을 오고갔습니다. 그럴 때마다 언제쯤 전시회를 열 것인지 물으면 글쎄요……, 하고 말끝을 흐리곤 하셨습니다. 그곳을 떠나온 뒤로도 하마나 하마나 하며 전시를 기다렸습니다. 너무 동안이 뜨자 혹시 황 선생이 그림에 대한 의지를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 아닌 걱정을 하기도 했습니다.

杞憂였습니다. 한 폭 한 폭이 저의 예감과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화폭에 휘몰아치는 눈보라가 소름을 돋게 했습니다. 가난한 지붕 위를 불어가는 바람이 덜컹덜컹 귓전을 울렸습니다. 십 수 년 전의 그 자리에 다시 서있는 착각이 일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炭川―석탄가루 시커멓게 흐르는 시냇물에 비낀 저녁노을은 서러움 저 너머의 찬연함이었습니다. 허물어져가는 광산촌의 어두운 응달에도 햇빛은 따글따글 어김없이 빛나고 있었고, 접시꽃이 피고 있었고, 바둑이가 선한 얼굴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탄가루로 핏발 선 눈을 크게 뜨고 정면을 응시하는 광부의 얼굴은 좀체로 잊히지 않을 듯합니다. 18년을 두고 그린 그림, 그것조차 아직 완성이 아니라고 말하는 그림을 상상할 수 있으십니까?

그것은 한 시대의 증언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처연히 스러져가는 한 시절이 오롯이 담겨 있었습니다. 우리가 잊어버린, 아니 애써 외면한 뒤안길이 고스란히 살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그곳에 있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알리바이―현장부재증명이었습니다. 근자 몇 년 사이 이만한 개인전을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습니다. 리얼리즘 미학의 눈부신 성취였습니다. 예술에서 말하는 리얼리즘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천금의 무게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진실이 곧 아름다움이라는, 그리하여 眞과 善과 美는 끝내 하나임을 이처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경우를 저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우리 근대미술이 도달한 아름다운 봉우리의 하나였습니다.

황 선생의 25년 세월, 사반생이 알알이 박힌 그림들을 보면서 아낌없는 찬사와 갈채를 보냈습니다. 반면 광산촌의 겨울바람보다 더 시린 바람이 제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것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쥘 흙도, 뉠 땅도 없는 저로서야 어쩌면 당연한 노릇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다못해 십 년 공력을 들인 정원 하나 마련하지 못했으니 더 말할 게 없지 싶습니다.

한 해가 간다고도 하고, 새해가 온다고도 하니 공연히 허전해지나 봅니다. 세상이 아무리 널뛰듯 어지러워도 이 땅 어디엔가 점점이 박혀 묵묵히 제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압니다. 역사는 대중 앞에 허접스러운 이름을 알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이런 분들이 만들어 가는 것임을 믿습니다. 그렇기에 언제라도 희망의 끈을 놓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다짐합니다. 골짜기를 울리는 마른 바람 소리가 차갑지만 가만히 힘을 주어 두 손을 불끈 말아 쥐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