果寓卽事 과천에서 - 김정희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7-04-01    조회 : 5791
  

      果寓卽事                           과천에서

          金正喜                                     김정희

            庭畔桃花泣                                     뜨락에서 눈물짓는 복사꽃

            胡爲細雨中                                     무슨 일로 가랑비 속에 울며 서있나?

            主人沈病久                                     주인이 병든 지 오래여서

            不敢笑春風                                     봄바람 살랑대도 감히 웃지 못한다오



사월입니다. 삼월 한 달이 꽃샘추위에, 비와 바람에 어수선하게 지나가버렸습니다. 봄이 오긴 온 걸까요? 봄이 왔다고는 하건만 정작 봄이 봄 같지 않습니다(春來不似春). 봄비가 오는 거야 반갑지 않을 이유가 없으나, 우박에 사나운 바람까지 동반하여 요란을 떠는 것조차 곱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어지간하면 비 그친 하늘이 산뜻하기라도 하련만 그조차 인색하기 짝이 없으니 슬며시 부아가 솟기도 합니다. 옛말에 돌담장 배부른 것(石墻飽腹), 사발에 이 빠진 것(沙鉢缺耳), 안주인 손 큰 것(家母手鉅), 어린아인 입바른 것(小兒捷口), 스님이 술 취한 것(僧人醉酒), 흙 불상 업고 물 건너는 것(泥佛渡川), 노인네 극성스러운 것(老人潑皮), 도시락 먹으며 소리내는 것(食簞有聲), 그리고 봄비 잦은 것(春雨數來)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일이라더니, 옛말 그른 거 하나 없나 봅니다.

절에 큰 살구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안아보면 두 아름 가깝고, 뒤에 선 이층 누각 지붕 위로 가지를 드리우고 있을 만치 키도 훤출합니다. 이만한 살구나무가 그리 흔치는 않지 싶습니다. 영락없이 늙은 모습이지만 해마다 장하게 꽃을 피웁니다. 올해도 변함없이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하건만 날씨는 끝도 없이 징징대고만 있습니다. 행여 봄비 속에 울며 피다 울며 질까 걱정입니다.

비 지난 뒤 꽃피는 늙은 살구나무를 바라보다 문득 과천시절의 阮堂선생이 생각났습니다. 병든 몸으로 빗속에 복사꽃을 바라보던 선생의 고적한 봄이 가슴에 잔물결을 일으킵니다. 삶이 이와 같거니, 삶이 이와 같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