卽事 마루에 앉아 - 서거정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5-10-02    조회 : 4559
  

         卽事                           마루에 앉아

          徐巨正                                    서거정

         捲簾深樹鵓鴣鳴                           발 걷자 깊은 숲에 비둘기 울음

         時見幽花一點明                           환하게 눈 밝히는 한 점 숨은 꽃

         少坐西軒淸似水                           잠시 앉은 서쪽 마루 강물처럼 시원하여

         秋晴時復勝春晴                           비 뒤의 가을 햇살 봄 햇살에 비하랴



우리 전통건축에는 북방적 요소와 남방적 요소가 교묘하게 배합되어 있습니다. 온돌과 마루는 그 현저한 예가 됩니다. 온돌은 난방이 필요한 지역, 추운 북국에서 발생한 건축 요소입니다. 마루는 덥고 강수량이 많은 남국에서 편리한 건축 요소입니다. 이렇게 전혀 이질적인 두 요소가 한반도에서 만나 처음부터 그러하였던 듯 천연스럽게 공존하고 있습니다. 여름과 겨울이 되풀이되고 봄과 가을이 갈마드는 한반도에 썩 어울리는 주거양식이 된 지 오랩니다. 시간과 경험과 지혜가 만들어낸 문화입니다.

이 가운데 마루는 건축적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전이공간, 음예공간, 여백의 공간입니다. 마루는 실내가 아닙니다. 실외도 아닙니다. 마루는 방이 아니 듯 마당도 아닙니다. 동시에 마루는 실내이기도 하고 실외이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방의 연장이지만, 어떤 때는 마당의 연속이기도 합니다. 벽 없는 방이자 지붕 있는 마당입니다. 겨울이면 마루 깊숙이 햇살이 비쳐들지만 여름에는 그 자리가 짙은 그늘로 채워집니다. 빛과 그늘이 서로에게 자리를 내주고 물려받는 공간이 마루입니다. 마루는 비어 있습니다. 비어 있음 그 자체가 마루의 목적이자 기능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마루는 자유입니다.

마루에 잘 어울리지 않는 일은 드뭅니다. 딱딱한 퇴침을 베고 낮잠을 청하는 일, 앉은뱅이 책상을 내놓고 글을 읽는 일, 호적수와 마주앉아 소리나게 바둑돌을 놓는 일, 찾아온 손님에게 차 한 잔을 대접하는 일, 그냥 무연히 서서 먼 산 바라기를 하는 일 따위는 마루에서 이루어져야 제 격입니다. 아직 추위가 덜 풀린 늦겨울 햇살을 받으며 성급한 해바라기를 한들, 한여름 벌렁 드러누워 등허리를 타고 오르는 바닥의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천장의 서까래를 세고 있다 한들, 가을날 실타래 같이 성긴 햇살의 빛줄기를 가닥가닥 풀고 있다 한들, 삼춘양광에 먼 아지랑이를 건너다보던 두 눈이 슬슬 실눈으로 변한다 한들 그것이 마루에서 일어나는 일인 바에야 시비거리가 못 됩니다. 허공에 만물이 깃들 듯, 빈 그릇에 무엇이든 담을 수 있듯 마루에서는 실로 많은 일이 이루어지고,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여러 해 전, 대구 근교의 남평 문씨 세거지를 답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수봉정사(壽峰精舍) 마루에 올라 걸음을 옮길 때마다 쿵쿵 가슴을 울리던 묵직하고 깊은 마루 울음소리를 잊을 수 없습니다. 비슷한 무렵 달성의 태고정(太古亭)을 찾은 적이 있는데, 옆 건물의 툇마루를 두고 뒷날 이런 표현을 하기도 했습니다. “볕살 따사로운 봄날 아무 욕심 없이 해바라기를 즐기거나 앉은뱅이 책상을 내놓고 글이라도 읽는다면 봄물로 불어난 호수처럼 행복감이 반짝이며 찰랑일 듯 싶다.” 어쩌면 우리네 전통건축에서 서정이 흐르는 공간을 꼽는다면 단연 마루가 으뜸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툇마루에 서서 담장 너머를 바라보니 물든 잎이 성근 벚나무가 건너다 보입니다. 비는 그쳤지만 아직 가을 햇살은 비쳐들 기미가 없습니다. 서편 하늘을 바라봅니다. 내일쯤이면 과연 가을 햇살이 봄 햇살보다 나은지 살펴볼 수 있을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