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亭夏日 산장의 여름날 - 고병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5-08-03    조회 : 3993
  


       山亭夏日                     산장의 여름날

          高騈(唐)                               고병(당)

          綠樹濃陰夏日長                          푸른 나무 짙은 그늘 긴긴 여름날

          樓臺倒影入池塘                          연못 속에 거꾸로 선 누대 그림자

          水晶簾動微風起                          수정발 살강살강 미풍이 일어

          滿架薔薇一院香                          시렁 가득 장미꽃 온 뜰에 향기!



온종일 문을 열고 지내는 날이 잦습니다. 앞문 양쪽 미닫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툇마루 달린 뒷문에, 창문까지 열고 앉으면 수정발에 이는 미풍은 아닐지라도 뒤뜰 서늘한 기운이 밀려들어 나오던 땀을, 달려들던 무더위를 저만치 밀쳐냅니다. 이럴 즈음 書案을 앞퇴에 내놓고 책 펼쳐 마주앉는 호사를 부리기도 합니다.

옥잠화를 아시겠지요? 이름 닮아 옥비녀 같은 꽃도 꽃이지만 향기는 또 어떻던지요? 옥잠화 향기는 낮고 조용합니다. 나직나직 아래로 낮게 깔립니다. 그래서 비안개 덮인 여름날 새벽에 가장 잘 어울립니다. 이때는 다소 무거운 공기에 미동도 않던 향기가 예불을 마치고 돌아서는 새벽 걸음에 채여 몸을 뒤챌 때마다 언뜻언뜻 코 끝에 와 닿습니다. 이윽고 아침이 되어 공기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마치 비안개처럼 서서히 퍼져오르다가 한낮의 열기 속으로 자취를 감추곤 합니다.

치자꽃은 또 어떻구요?

  우윷빛 치자꽃은 화려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儉而不陋라고나 할까요. 꽃잎의 빛깔은 어떤 고결함이 느껴질 만큼 순수합니다. 흰빛은 흰빛이로되 차갑지 않습니다. 백자로 비유하자면 그것은 설백색이 아니라 유백색에 다가섭니다만 실로 그 이상의 온기와 결을 품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생명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향기도 그 비슷해서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희미하지도 않습니다. 코 끝에 향기가 스치면 저도 모르게 가만히 눈을 감게 됩니다. 華而不侈라 일러도 무방할 듯합니다. 물줄기처럼 쏟아져내리지 않고 골안개마냥 부드럽게 풀립니다, 그 향기는. 사람에 비긴다면 아무래도 발랄한 처녀이기보다는 언뜻 생의 이면을 엿볼 수 있되 아직도 젊은 날의 열정과 매력을 그리 깊지 않은 곳에 감추어 둔 삼십대 후반의 여인에 가깝겠습니다.

  과연 우리의 삶이 저 치자꽃만큼이라도 될 수는 없는 걸까요? 비록 손바닥만한 넓이만큼이지만 제 주위를 소슬하니 밝힐 수 있고, 우산 하나로 가리고도 남을 작은 허공에나마 야무진 향내를 뿌릴 수는 없는 걸까요? 하여, 우리의 작은 어깨에 가만히 눈감은 얼굴 하나 슬며시 기대게 할 수는 정녕 없는 걸까요?

언젠가 써둔 글입니다. 제 보기에, 치자꽃은, 치자꽃 향기는 이러합니다. 그래서 치자꽃 향기는 우윷빛입니다.

마루에 앉아 책을 뒤적이다 보면 무더기무더기 싱싱하게 자란 옥잠화의 향기가 마당을 건너 오고, 선물 받은 화분에서 댓돌 곁으로 옮겨 심은 치자나무 꽃향기가 코 끝을 스칩니다. 설핏 해가 기우는 저녁 무렵,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법당 지붕의 내림마루들과 산의 능선들이 고운 평행선을 그리며 희미한 실루엣을 만듭니다. 여름날의 하루를 이렇게 맞이하고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