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보사 삼층석탑 탁본 후기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5-05-28    조회 : 5704

  
 
어제는 부처님 오신날이었다.
처음으로 연등을 들고 탑돌이를 했다.
불자들이 낮은 목소리로 내는 "석~가모니불" 염불소리와 스님들의 목탁소리는 깊은 울림의 합창이 되어 산사에 울려퍼졌다. 행렬은 천불전 앞의 3층석탑을 돌고 돌다가 천불선원 앞마당을 거쳐 산문까지 내려갔다가 돌아왔다.
손에 든 연등 안의 촛불이 거의 다 탈 때까지 탑돌이는 계속되었다.
어스름한 저녁 수백개의 연등이 매달린 법당 앞에서 귓전을 울리는 염불소리를 들으며 탑을 도는 것도, 오색 비늘의 거대한 용이 기어가는 듯한 탑돌이 행렬에 끼어 탑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종교행사라는 것이 다 그렇겠지만 불교의 연등행사나 탑돌이는 그 중에서도 매우 큰 규모이고, 주술적인 성격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불자가 많은 절에는 큰 탑이 있기 마련이다. 탑돌이를 해도 이렇게 수백·수천 명이 하기 때문이다.
큰 절은 큰 산에 있다. 절집이 들어설 터가 커야하기 때문에 넓은 터를 닦을 수 있을만한 크고 튼튼한 골이 있는 산에 대사찰이 들어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작은 산에 있는 작은 절이라면 어떨까? 큰 전각을 지을 필요도, 또 그럴만한 시주도 없는 절은 자그마한 산에 작은 터를 닦고 작은 법당과 작은 탑을 세운다.

군위 선방산船放山 지보사持寶寺. 작은 산에 자리한 작은 절이다.
이 절에 있는 삼층석탑 역시 작고 아담한 탑이다.
원래 산 너머 극락사란 절에 있던 탑이었으나 절이 망하자 읍내의 동부동 절골로 이사를 갔다가 다시 지보사로 옮겨왔다고 한다.
  

탑은 통일신라 전형양식을 따랐지만 기단부의 탱주가 하나로 줄어든 점이나 하층기단에 사자상, 상층기단에 팔부중상이 새겨진 것은 시대가 내려오는 특징이다.
상층기단 갑석 위에 앙련으로 장식한 별석받침이 있는 것과 지붕돌의 층급받침이 네 단인 점은 이 탑을 9세기 이후 석탑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 작은 석탑에서도 불자들은 탑돌이를 했을 것이다. 물론 많은 수는 아니었겠다.
그러나 석가모니의 탄생을 기리고 그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는 신심에는 차이가 없다.
오히려 지보사 탑만의 미덕이라고 할까, 기단부에 조각된 기이하고 아름다운 돋을새김상들을 보면 신심이 더더욱 솟구쳐 생겨났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금강산 신계사지의 삼층석탑과 지보사 삼층석탑은 탑의 비례나 형식, 팔부중상의 도상과 배치가 거의 일치하고 있다. 또 충남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은 탑 형태에는 차이가 있으나 기단부 팔부중상의 배치와 도상은 위의 두 탑과 같다. 
  

이렇듯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탑들이 서로 중요한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당시 불교미술과 불교사 연구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9세기 이후 통일신라 불교계에 호족세력의 지원을 받은 선종이 유행하면서 불교문화도 경주 중심에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에 따라 스님들도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행하거나 강석·법석을 열었다.

아마도 지보사 석탑과 신계사지 석탑, 보원사지 석탑은 어느 한 스님이 불사를 일으켜 세운 탑으로 보인다. 그리고 물론 동일한 석탑 제작자(또는 단체)나 조각가에게 일을 맡겼을 것이다.
시간상으로는 앞뒤가 있겠지만 이 석탑 3기에 새긴 팔부중 도상이 거의 똑같고, 천-가루라, 용-야차, 아수라-건달바, 긴나라-마후라가의 네 쌍이 우주隅柱를 사이에 두고 형성된 특이한 배치 형식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별다른 통제나 규정이 없는 한 발주처에서는 일 맡겼던 곳에다 계속 맡기기 마련이다. 불사도 마찬가지 아닐까.

막 떠오르는 것으로 군위 인각사에서 입적한 일연스님이나 소백산 비로사의 진공대사가 양양 진전사지에 가서 수행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뿐만 아니라 많은 고승들의 행적 속에서 드러난 전국에 걸친 수행편력을 상기한다면 과거 극락사의 한 스님이 신계사와 보원사에서도 머물며 서로 흡사한 탑들을 세웠던 것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닐 것이다.

팔부중
팔부중은 불사리를 지키는 호법신만은 아니다.
이들은 다른 중생들과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달음과 구원을 얻어야 하는 존재이다. 수많은 경전에서 팔부중은 설법장에 모인 중생의 하나로 소개되고 있으며, 특히 탑과 관계된 부분에서 공양을 드리거나, 설법을 듣는 모습으로 자주 등장하고 있다.

밀교 경전에서도 팔부중은 행법에 의해 소환되어 환희심을 내게 하는 대상으로 나타난다.
천룡팔부나 야차녀 등을 섭복하여 환희심을 일으키게 한다는 벌시가라나법伐施迦囉拏法(섭소경애법攝召敬愛法, Vaśīkarana)이라는 행법은 팔부중이 교화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려준다.

팔부중이 호법신장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진 것은 호국삼부경 가운데 하나인『금광명경』중에 사왕(사천왕)이 팔부중과 함께 "보살들을 받들어 따르고 공경하고 수호하며 일체의 재앙과 침략과 괴로움을 받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라고 서원한 내용 때문이다.

그러나 팔부중의 역할을 '護法'에만 치우쳐 생각할 수는 없다.
몇몇 경전에서 다툼이 없고, 역병이 돌지 않으며, 병란이 일어나지 않으며, 악한 바람과 비가 없고, 한파와 폭염이 없게 하는 등 재앙을 막거나(攘災), 곡식과 쌀이 풍요롭고 알차도록 하는 등 복을 불러오는(招福) 일을 하고자 다짐하는 것이 팔부중이다.

팔부중은 그 자신이 법을 증득해야 하는 무리이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중생의 화합이나 친목을 위해 도움을 주거나 재앙을 막고 복을 가져다 주는, 말하자면 신자와 신앙대상 사이의 매개자 또는 중간자와 같은 존재이다. 

상층기단 팔부중상
지보사 탑 팔부중상은 신체 동작의 표현이나 세부 묘사가 매우 사실적이고, 각 상들이 지닌 상징성도 잘 드러난 작품이다.
탑 제작에 사용한 돌이 비교적 무른 사암 계통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만한 부조상은 경주지역에서도 찾기 쉽지 않다.
  

머리 위에 거대한 물고기(마카라)를 얹은 수천 바루나신으로 대표되는 천신과, 판타지 소설에나 나올법한 칼날이 불꽃에 휩싸인 화염검을 들고 역시 불꽃이 타오르는 여의주를 쥔 가루라상은 각각 북쪽 기단부 오른쪽과 서쪽 기단부 왼쪽에 위치한다. 새부리가 표현되었을 가루라상의 얼굴 부분이 파손되어 있는 것이 못내 아쉽다.

머리에 물고기형 보관을 두르고 있는 상들의 도상적인 기원은 불교의 팔방천 중 서방 수천水天인 바루나Varuna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인도에서 바루나신은 마카라Makara를 탈것으로 삼는다. 마카라는 한역불전에서는 그 음을 따서 '마갈어摩竭魚'로 번역되는데 큰 바다에 사는 해수海獸를 뜻하며, 물고기·돌고래·악어·코끼리의 모습이 복합적으로 적용된 신화적 존재이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물고기와 같이 생긴 마카라를 수천 바루나의 보관형태로 적용하여 그 정체를 나타냈다. 즉 팔부중의 천신을 팔방천 중 하나인 바루나로 상징한 것이다.

  
이렇듯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수천의 형상 가운데 특히 물고기를 머리위에 짊어진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지만, 마카라는 사천왕사지 녹유사천왕상전 부조의 테두리 아래쪽 장식(좌)의 예와 같이 코끼리처럼 긴 코를 가진 모습으로 표현한 경우도 있다. 또 일본 고후쿠지 건칠 팔부중상에도 마카라관을 쓴 상이 있다. 우리나라 석탑부조에서 바루나상은 9세기 이후에 등장하며 새부리를 가진 가루라상과 항상 쌍을 이룬다. 



천신과 가루라는 고대 인도신화에서도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등장한다. 가루라는 비슈누의 탈것이며 인드라의 친구이기도 하다. 금강저로도 상처하나 입히지 못하는 막강한 힘을 가진 가루라에게 반하여 인드라가 친구 되기를 요청했다고 한다. 관련신화를 요약해서 올려본다.

  
뱀족에게 납치된 어머니를 돌려받기 위해 그들의 요구대로 신들의 감로수 아무리타를 구하고자 신들의 세계로 날아간 가루라는 강력한 신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아무리타를 차지했다. 이 과정에서 가루라의 힘에 반한 비슈누신은 가루라에게 영생을 주게 되었고 반대로 가루라는 비슈누신의 탈것이 될 것임을 맹세하였다. 한편, 아무리타를 돌려받기 위해 금강저로서 가루라를 습격한 인드라 역시 그 힘을 꺾을 수 없었고, 오히려 서로 영원한 우정을 맹세하게 된다. 이어 인드라가 아무리타를 돌려줄 것을 요청하자 가루라는 자신이 뱀 앞에 감로수를 놓으면 곧바로 가져가도록 했다. 이에 만족한 인드라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자 가루라는 자신의 어머니를 노예로 만든 뱀족을 생각하고선 어떤 강력한 뱀도 나의 일상적인 음식으로 되게 해달라고 하여 인드라는 이것을 승낙한다.

가루라는 뱀족에게 가서 그것을 ‘풀’위에 놓았으니 목욕하고 청결히 한 뒤에 그것을 먹으라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를 돌려받게 된다. 가루라의 말대로 뱀들은 목욕을 한 뒤에 풀숲으로 가서 감로수를 찾았지만 이미 아무리타는 인드라의 손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그제서야 속은 것을 알고 그들은 실망에 찬 눈빛으로 혹시 한 방울이라도 덤불 속에 떨어져 있지는 않는지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뱀의 무리는 이 풀 저 풀 혀로 감아서는 훑어 내려갔다. 그러는 도중 혀가 날카로운 풀에 베어 두 갈래로 잘리고 만다. 그 뒤부터 뱀의 혀는 두 개로 되어 날름거리게 되었다고 하며, 노여움에 찬 독수리 가루라는 어머니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그 원수의 자식들인 뱀들을 잡아먹기를 그치지 않았다.
  

남쪽 기단부의 사자관을 쓴 건달바는 공후라는 현악기를 능숙하고도 여유롭게 뜯고 있는데, 얼굴이 셋, 팔이 여섯 달린 서쪽 기단면의 아수라상과 함께 짝이 된다. '마징가Z'에 나오는 아수라 백작은 얼굴이 둘이다. 그런데 사실 아수라의 얼굴은 이처럼 셋 이상이니 만화에 나오는 악당은 오히려 야누스 백작이라고 하는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남쪽 기단부 오른쪽에는 길게 이어진 구슬을 입에 물고 있는 상이 있는데 야차로 추정된다. 야차는 나무와 광물을 지키는 신인데, 이 상들이 물고 있는 염주구슬은 보리수 나무나 보석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야차상은 동쪽 기단 왼쪽의 머리 위에 용을 얹고 있는 용상과 한쌍이다. 용과 야차는 인도 드라비다족의 신앙대상으로 과거 이들을 침범했던 아리안족의 신이었던 천-가루라의 쌍과는 반대쪽에 배치된다.
  

동쪽 기단부 오른쪽의 새와 마소의 옆얼굴이 보관에 나타난 긴나라상과 북면 뱀을 머리 위에 올린 마후라가상은 동물 또는 축생이라는 점에서 한쌍으로 묶인 듯하다.

훼손이 진행되고 있는 다른 상과 달리 마후라가상과 아수라상은 아직 표면 박락이 진행되지 않고 있어 탁본이 가능했다. 아수라상은 상당히 높은 부조라 결과물에 원작의 아우라를 담기 힘들었으나 마후라가상은 제법 작품이 되었다.

팔부중상들의 춤추거나 공양하면서도 때로는 위협하고 경계하는 모습, 혹은 기도하거나 악기를 연주하다가도 칼과 몽둥이 등의 무기를 잡는 아이러니한 모습에서 우리는 통일신라 석탑 부조상의 역동적이며 복합적인 상징성을 엿볼 수 있다. 또 신화적·문헌적으로 밀접한 상들끼리 쌍을 이룬 배치 형식은 통일신라 석탑 조형의 또 다른 일면이기도 하다.
  

하층기단 사자상
지보사 탑에는 팔부중상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층기단에 새겨진 여덟 마리 사자상에는 균류와 이끼, 흙먼지가 잔뜩 덮여 있어 그 모습을 제대로 감상하기는 힘들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여간 재미있는 조각이 아니다.
두 앞다리에 턱을 괴고 잠자는 듯한 모습의 사자, 고개를 옆으로 돌려 앞발 위에 얼굴을 웅크린 사자, 고개를 홱 돌려 뭔가 노려보는 듯한 사자, 심지어 얼굴을 석탑 내부로 돌리고 있어 뒷통수만 보이는 사자도 있다. 약간 당황스럽기는 하나 이 고개를 돌린 사자 덕분에 이 지보사 탑은 더욱 생기가 넘치는 작품이 되었다. 참배자는 안쪽을 바라보는 사자의 시선으로 인해 석탑의 내부 공간까지 새삼스럽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 사자상들을 새긴 조각가는 기술도 훌륭하지만 재치가 넘치는 사람이었음이 틀림없다.

지보사 삼층석탑은 아직 정확한 연대가 밝혀지지 않은 탑이다. 문화재 해설에는 고려초기의 석탑이라 하고, 또 경상북도 문화재대관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라고도 한다. 이 탑을 고려시대로 보는 논거로 초층탑신의 별석받침과 4단으로 된 지붕돌 층급받침을 드는데, 이것은 이미 통일신라 석탑에도 보이는 현상이기 때문에 결정적 근거가 될 수 없다. 오히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신계사지 석탑과 양식적으로 거의 일치하는 사실이나, 우수한 조각솜씨의 기단부 돋을새김들을 보면 지보사 석탑의 조성연대를 통일신라 9세기까지 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

지보사 탑은 최근 기단부 팔부중상 표면이 급격하게 박락되고 있다. 손만 대도 표면이 떨어져 나갈 정도이다. 지보사 스님께서 보수신청을 했을 때 이를 검토하러 온 담당자가 이 탑보다 더 시급한 상태의 보물들이 많기 때문에 이 탑에는 예산을 쓸 수가 없다고 했다 한다. 그러면 여기서 작품들이 더 상하기를 기다렸다가 보수를 해야한다는 말인가. 지금과 같은 아름다운 부조상들을 온전히 보존하려면 하루 빨리 보존처리가 이루어져야 한다. 보존처리는 작품이 이미 훼손된 다음에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몸돌의 문비조각까지 탁본을 마치자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므로 급히 도구들을 갈무리하여 지보사에서 철수하였다. 아쉬웠지만 이번에는 눈에만 아니라 종이 위에도 담아 가니 뿌듯했다.



한재원(직지성보박물관 학예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