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갈항사터
글쓴이 : 관리자     첨부파일 :       날짜 : 03-01-15    조회 : 2182
오봉리 갈항마을은 털털거리는 길일망정 찻길이 이어진 금오산 서쪽 골짜기의 끝동네이다. 시멘트로 포장된 길로 올라서서 당산나무 아래 서면 어제와 오늘을 함께 보여주는 사진전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우리의 가난했던, 그리고 아늑했던 60∼70년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마을이 판박이처럼 서 있다.
마을을 왼편으로 끼고 경운기 한 대가 간신히 지날 길을 따라 두어 굽이 돌아 오르면 산자락을 일구어 풀어놓은 밭 여기저기에 현판도 붙지 않은 작은 전각, 제 목을 잃고 새 얼굴을 한 불상, 동·서로 나뉘어 선 표지석 따위가 눈에 들어온다. 우리 석탑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쌍탑의 고향 갈항사터다.
  
일연스님은 『삼국유사』에서 효소왕 1년(692)에 당나라에서 귀국한 화엄종의 고승 승전(勝詮)법사가 그 뒤 어느 해엔가 여기에 절을 짓고 돌해골을 청중으로 하여 『화엄경』을 강의했는데 그 돌해골 80여 매가 절에 전해오며 자못 영험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엉뚱하게 바뀌어 절을 지을 때 돌해골로 주추를 놓았다는 전설로 굳어져 전해지기도 한다. 실은 '돌해골'이라는 것도 어떤 사물을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다. 글자 그대로 돌해골로만 해버리거나, 해골이 굳어서된 화석이라거나, 그도저도 아니면 그냥 돌이라고 얼버무리기도 하지만 모두 미심쩍기는 마찬가지다.
한때는 전성기 신라 왕실사람들의 발길이 분주했을 갈항사(葛項寺)의 내력은 앞에 든 일말고는 그리 알려진 게 없다. 일연스님 때는 물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갈항사가 소개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조선 중기까지는 엄연히 남아 있었던 갈항사가 언제 무슨 까닭으로 그 모습을 감추게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저 많은 유물들이 밭 속에서 발굴되었고 아직도 묻혀 있다 하니 혹 어느 땐가 큰 산사태를 당했거나, 아니면 불 먹은 기와조각이 흔전인 것으로 미루어 큰불을 만났던 것은 아닐까 하고 막연히 가늠해볼 뿐이다. 절이 어떻게 자리잡고 있었는지도 그리 또렷하지 않다. 마을사람들에 따르면 지금은 전각 안에 남향으로 모셔진 불상이 발굴 당시에는 서쪽을 향하여 앉아 있었다고 하니, 그렇다면 동·서로 서 있던 탑과의 관계가 애매해져 도무지 안개 속 같다.
절터를 함께 지키고 있던 식구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세인의 눈길에서 멀어져 그저 조용하던 산중이 분주해지기 시작한 것은 1914년 무렵, 동쪽 탑의 기단부에 새겨진 귀중한 금석문이 세상에 알려진 다음부터다. 2년 뒤인 1916년 2월 12일 밤 유물을 탐낸 도굴꾼들에 의해 탑은 무너지고 그 안의 유물은 도난당한 듯하다. 그 바람에 그 해 탑들은 경복궁으로 옮겨져 오늘까지 두 탑이 지키던 자리는 표지석만이 무표정하게 서 있을 따름이다.
  
  
이 절터에 또 다른 탑이 있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는, 팔부중상이 조각된 석탑 기단부의 부재로 보이는 석물 네 점도 제 있던 곳을 떠나 남면 사무소 뜰에 한갓 장식물처럼 주저앉아 있다. 이들은 일꾼들에게 품삯이 지불되지 않아 발굴이 중단된 사이에 도난을 당하여 트럭에 실려가다가 불심검문 덕분에 되찾게 되었다는 게 한 동네사람의 말이다. 그 후 발굴은 중단되고 아직도 매년 경작이 이루어지는 밭 속에는 그때 잠시 햇빛을 보았던 다른 석물들이 그대로 묻혀 있다고 한다.
제자리에 남아 있다고 꼭 다행인 것만도 아닌 모양이다. 지권인을 한 손 모양으로 보아 비로자나불이 분명한 석불상은 밭 한쪽 알루미늄 철창에 갇힌 채 본래의 머리를 잃고 이물스러운 새 머리를 목 위에 얹은 채 말이 없다. 지금도 사과나무가 들어선 밭에는 한두 점이 아니라 층을 이루며 무더기로 파묻힌 기와더미가 무심한 삽날에 치여 곳곳으로 흩어지고 있다. 이렇게 땅속을 비롯해 산지사방으로 흩어진 살붙이들을 생각하며 그나마 옛 절터를 지키고 있는 것이 석조석가여래좌상이다.
그밖에 그냥 지나치기 쉬운 유적이 하나 더 있다. 그다지 물이 넉넉해 보이지 않는 이 골짜기에서 지금도 해마다 밭에 물을 대는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는 옛 우물이다. 마치 커다란 독을 묻은 모양으로 생긴 이 우물은 절터로 들어서는 길 왼쪽 밭둑 아래 숨어 있다. 바닥까지 4~5m 는 너끈할 깊이를 막돌을 공글려 가운데로 배가 부르게 쌓아올리다가 차츰 아귀를 좁혀 아물린 솜씨도 그럴듯하고, 당장 두레박을 던져 퍼 올려 달게 마셔도 좋을 만한 물이 언제나 적당한 깊이로 고여 있어 신기하다. 언제 만들어지고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전하는 말도 기록도 없어 짐작조차 할 수 없으니, 이 물을 길어 차를 달이고 나물을 씻던 저 신라적 스님들을 멋대로 상상해보는 건 우리들의 몫이다.  

그림) 갈항사터 출토 석조물(현재 직지성보박물관 야외전시중)

흥선(직지성보박물관장)